단숨에 최다 음반판매 신기록… 1987년 서라벌레코드80년대 최고 인기작곡가 이영훈의 명곡으로 대중가요 수준 업그레이드

노래보다는 말 잘하는 DJ로 주목 받던 이문세의 4집(1987년)은 대중가요의 부흥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80년대 최고의 명반 중 하나였다. 기록적인 음반의 판매는 물론이고 대중의 절대 지지를 얻어내며 가요의 수준을 끌어올린 완벽한 성공작이었다.

격동기였던 80년대는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 했다. 긴 동면에서 기지개를 켠 조용필이 1인 독주 체제를 구축하는 가운데 조동진을 필두로 록그룹 들국화, 김광석, 노래를 찾는 사람들, 김현식, 하덕규, 김두수, 유재하 등 언더그라운드 진영의 공존이 이루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80년대 이전의 시기가 팝송시대였다면 80년대 이후는 단연 대중가요의 시대라 규정할 만하다. 그만큼 팝송을 능가하는 수준 높은 명반과 명곡들이 봇물 터지듯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원할 것 같았던 라디오의 팝송 프로그램들도 대중가요의 거센 침공에 맥없이 하나 둘 권좌를 내어주어야 했다.

이문세를 언급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작곡가 이영훈이다. 2006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힘겨운 투병 중인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80년대 최고의 인기 작곡가다.

그는 이야기꾼에 불과했던 이문세를 빅 스타로 등극시킨 1등 공신이었고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외국의 그것과 필적하게 끌어올린 ‘팝 발라드’ 장르의 개척자다. 그는 발라드와 포크의 모호한 경계를 현악기가 가미된 클래식 음악기법 도입으로 확실하게 구분시켰다.

‘팝 발라드’로 규정되는 장르의 탁월함은 변진섭, 신승훈, 조성모라는 발라드 황제 급 가수들로 이어지며 폭 넓은 대중의 사랑을 한껏 누리고 있다.

1985년 신촌블루스 엄인호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대중음악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대중가요에 팝과 클래식을 접목해 격조 깊은 사랑노래를 제시한 이영훈의 음악은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창법으로 노래한 이문세를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을 얻어냈다.

150만장이 팔린 3집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 '소녀' '휘파람'을 시작으로 ‘발표는 곧 히트’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며 거침없는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거의 모든 이문세의 히트곡은 다 이영훈이 작곡한 노래로 봐도 무방하다. 당시 두 사람에 의해 발표된 노래들은 거의 다 대중매체의 인기차트 최상위를 점령했다.

87년 칙칙한 분위기의 4집 초반이 발매되자 제작사는 공전의 히트를 예감했다. 이에 뮤지션 정보를 보강하고 독특한 모자이크 분위기의 사진으로 재킷디자인을 수정한 재반을 거의 동시에 발매했다.

추가로 제작한 45회전 12인치 싱글LP도 최상의 음질을 뽐내는 이례적인 보너스음반이었다. 이 앨범은 제작사 '킹 프러덕션'에 독자적인 공장을 소유하게 했고 메이저급 음반사로 거듭나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무려 285만장을 기록한 4집의 판매고는 단숨에 그때까지의 사상 최다 음반판매 기록을 뒤엎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타이틀곡 ‘사랑이 지나가면’과 ‘그녀의 웃음소리뿐’은 대중가요의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킨 명곡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김동석 오케스트라의 현악연주가 인상적인 ‘밤이 머무는 곳에’와 고은희와 함께 노래한 ‘이별 이야기’, 팝과 록의 접목을 통해 흥겨운 비트를 선사한 ‘그대 나를 보면’, 리듬감이 느껴지는 ‘가을이 오면’, ‘깊은 밤을 날아서’, ‘슬픈 미소’, 그리고 이문세의 가성이 흥미로운 ‘굿바이’ 등 모든 수록곡들은 내용(음악)과 형식(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이 음반을 명반으로 승천시켰다. 또한 김광석, 함춘호 등 뛰어난 연주자들의 세션과 김명곤의 편곡은 앨범의 무게감을 더해주었다.

주류스타이면서도 TV보다는 라디오를 통한 신비 마케팅과 전담 작곡가시스템을 통한 음반과 공연이라는 활동반경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차별적인 것이었다. 그 자신감은 새롭고 뛰어난 음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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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 대중문화 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