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를 화해시키는 연의 비상영혼의 순례를 촉발시키는 끈… 지우고 싶은 상처와의 직접대면과 치유 그려내

해마다 부산영화제에 가면, 가을의 해운대 바다를 지칠 줄 모르고 바라보다가 여분의 시간이 생기면 범어사를 찾았다.

올 겨울에도 범어사를 찾아갔다. 그곳은 강인한 인상을 주는 일주문이 초입에서부터 검문소의 헌병처럼 버티고 서서 내방객의 속세 때를 벗겨내고 있다. 조금 더 진입하면 웅장한 대웅전도 없는 불심을 불러일으킬만한 근엄한 자태로 자리하고 있다.

일주문과 대웅전 보다 범어사를 더 범어사답게 만드는 것은 한 쪽 편에 서 있는 580년 묵은 은행나무다. 이 나무는 500년을 부동자세로 서서 금정산과 한국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로 종교를 떠나서 내방객들을 순식간에 숙연하게 만든다.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신도들이 탑을 돌듯이 필자는 은행나무 주위를 돌면서 범어사에 방문했다는 사실과 수많은 기간의 응결된 나무를 경외스럽게 바라본다. 은행나무는 범어사로 필자 마음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등불과 같다.

누구나 영혼의 순례자가 되어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방문하고 싶은 곳이 존재한다. 그곳은 대개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 퇴적되어 기억의 붓으로 이야기를 새겨놓은 유년의 공간이기 쉽다. 태평양 건너에서 이름을 날린 영화 평론가 로저 애버트도 키에슬로프스키 영화에 공감하는 사적 이유에 대해 토로한 적 있다.

그는 “내가 키에슬로프스키에게 그토록 강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은 어린 시절에 찾아갔던 장소들을 다시 방문하는 것으로 초월성을 잠시 나마 찾아보고 싶은 때가 있기 때문”이라고 실토 하였다. 유년의 장소는 이렇듯 마음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곳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눈을 감고 지나가고 싶은 고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마크 포스터의 영화 <연을 쫓는 아이>는 누구나 떠나온 곳으로 마음이 흘러가듯 과거로 여행을 촉구하는 영화다. 그 여행은 그리움에 잠못 이루다가 아침 일찍 여장을 챙겨서 떠나는 여행이기 보다 과거의 불편한 기억과 상처를 마주쳐야하는 할 때 긴장이 생겨난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과거의 상처와 지우고 싶은 기억과 대면해야한 긴장과 고통과 모험을 정면으로 보여준 영화가 <연을 쫓는 아이>다.

아프카니스탄 출신 작가인 할레드 호세이니는 <연을 쫓는 아이>라는 소설로 고향으로부터 떠나왔지만 고향의 부름에 다시 과거의 시간과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한 인간의 내면을 펼쳐보여준다.

주인공인 작가 아미르에게 고향은 창작의 발원지이지만, 모유를 수유하는 것 같은 평온함은 찾아보기 힘든 공간이다. 그곳은 발없는 마음이 달려가는 유년의 유토피아나 순례지 같은 낭만적 공간이기 보다는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 교차하는 곳이다. 과거의 공간은 추억의 이름으로 개인을 호명하기도 하지만 상처의 발원지로 인간을 밀어내기도 한다.

작가로 성장한 아미르에게 아프가니스탄은 바로 후자에 가깝다. 아미르에게 고국이며 고향인 아프가니스탄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부친과 망명을 단행했던 곳이며 친구를 모함하여 불행에 빠뜨린 기억이 자라고 있는 야생지다. 과거는 근원적 그리움으로, 노스탈지아로 유혹하고 상처의 기억으로 접근을 방해한다.

과거의 상처는 화해의 쓴 약을 수용하는 자에게만 선별적으로 치유의 길을 허용한다. 아미르의 귀향은 과거와 화해하고 묵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여행과 동의어다.

귀향의 동기는 라힘 칸의 편지이지만 결국 무의식에 서식하면서 아미르의 삶을 위협하고 잠식했던 과거의 상처와 만나고 치유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이다.

호세이니의 소설이 미국에서 장기간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하자 마크 포스터 감독은 테러의 공포를 환기시키는 아프카니스탄에서 친구의 아들을 구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한다. 탈레반 무장 세력의 아지트는 영화적 공간으로 최적이며 친구의 아들구하기는 긴장과 스릴의 서사를 제공해준다.

즉 주인공 아미르가 친구의 아들을 구출하겠다는 임무를 부여받고 위험을 무릅쓰고 탈레반의 은신처로 잠입하여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는 이야기는 주인공이 사지에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미국으로 귀환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웅서사와 절묘하게 일치한다. 원작의 내용과 할리우드 영웅 서사의 기묘한 일치는 소설 독자와 영화 관객 모두의 지지를 얻어내는 성공요인으로 작용한다.

마크 포스터 감독은 단지 고향친구 아들 구하기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서사 공식에만 집중하지 않고 한 인간이 어떻게 유년의 상처와 대면하고 자기 치유 과정을 거쳐 과거와 화해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여기서 이 영화는 할리우드 상업영화에서 삶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 예술영화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아미르와 하인의 아들인 하산은 아프카니스탄에서 성장한다.

아미르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으며 하산을 위해 책을 읽어준다. 책을 읽어주는 아미르와 책읽어주는 것을 듣는 하산은 이미 두 인물이 써내려 갈 이력서를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책읽는 자는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해나갈 미래가 열려있으며 수동적으로 책의 내용을 듣고 있는 어린 하산은 타의에 의해 삶이 결정될 운명이다. 그의 삶은 책읽는 자에 의해 희극도 되고 비극도 되는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다시 연을 날리는 아미르와 연을 쫓아 줍는 하산으로 역할 분담되어 능동적 주인공과 수동적 주변인물로 재확인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연을 날리는 아미르가 능동적이고 계급의 우위에 서 있지만 연을 쫓는 하산이 오히려 관객의 관심과 지지를 받게 된다. 하산은 아미르에게 “너를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연을 찾아오겠다”는 말을 하고 늘 몸소 실천한다.

아미르에 대한 하산의 태도는 관객의 환상을 건드린다. 하산은 익명의 관객들에게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철저하게 희생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급기야 아미르는 착한 하산을 인정욕구와 질투심으로 인해 모함으로 불행의 길로 내몰고 만다. 이 상처는 고향을 떠나서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보다 더 직접적으로 아미르의 삶을 지배하고 구속한다.

아미르에게 상처는 그의 삶을 고향과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감금한다. 그래서 아미르는 결국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찾게 되며 탈레반 무장세력의 아지트에 감금된 하산의 아들을 구출하는 일에 뛰어들게 된다.

결국 아미르는 하산의 아들을 구출하여 연을 날리게 함으로써 치유의 잔을 들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 하산의 아들이 연을 날린다. 이 장면은 과거와 현재의 악수를 가시화한 것이며,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과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회복과 치유라는 의미의 마침표다.


문학산 부산대 교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