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아주 특별한 여행] ① 8개월간의 유럽숙소여행감옥 개조한 게스트하우스 초상화와의 동침 등 잊지 못할 추억들

2003년에 5개월, 그리고 2006년 겨울에 다시 3개월 동안 나는 유럽의 숙소들을 여행했다. 슬로베니아의 예술가들이 옛날 정치범의 감옥을 개조해서 세상에서 가장 컬러풀한 게스트하우스로 만들어놓은 숙소, 비엔나와 리옹의 아름다운 풍경이 고스란히 화폭처럼 창문에 담기는 언덕 위의 숙소들, 원룸 아파트 한 채를 통째 빌려쓸 수 있는 파리의 숙소, 19세기의 대저택에서 수상한 초상화들과 함께 잠드는 이탈리아의 숙소들…, 그 곳에서 보낸 밤들은 지금까지 내 마음에 유럽의 바람을 실어나른다.

■ 베제레디가 6번지의 골방

부다페스트 베제레디가 6번지의 작은 골방. 그 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문을 열자, 일렬로 빽빽한 침대들 위에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들로 누워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람과 옷과 가방들이, 책과 음료수와 빵들이, 심지어 그 방의 공기와 천장과 바닥과 벽까지 그곳에서는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존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창문을 열지 않은 듯 방안의 공기는 곧 폭발할 것 같았다. 음악소리와 말소리, 웃음소리 때문에 나는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헬로우-."라고 외치려던 내 목소리는 저절로 기어들어갔다. 0.1초 후에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두 일본인 여행자들이었다. 딱 한 명 서양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놀랍게도 일본어를 썼다. 그들은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은 생전 처음 본다는 듯 나를 어색해 했다.

나는 마치 침입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단지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싸고 편한 숙소를 찾아왔을 뿐이었다. 유럽의 어느 골목길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베제레디가 6번지의 작은 골방 안에 있었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수다를 떨면서 그 방안의 침대와 테이블처럼 방바닥에 붙어있었다. 보통은 오후 두세시까지 늘어지게 잔 다음, 집 앞의 중국집으로 볶음밥을 먹으러 외출했다 돌아오면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대부분 이 곳에 온 지 한 달이 넘었다고 하면서 아직 부다성(부다페스트 언덕 위의 유명한 성)도 가보지 않았단다. "체인다리(다뉴브강을 건너는 유명한 다리) 야경은 봤니?"라고 물으면 "몰라. 도쿄의 야경도 못 봤어."라고 대답했다. 대체 부다페스트까지 와서 종일 아무 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건 그냥 아무 것도 안 하는 거였거든. 일본에서 나는 늘 무언가를 하고 있었으니까."

고개가 끄덕여졌다. 생각해보니 여행을 떠나올 때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도 핸드폰이 울리지 않는 곳에서 마음껏 뒹굴기, 자명종 소리가 없는 곳에서 눈 뜨기,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밥 먹기, 내일 아침 따위 걱정하지 않고 밤새도록 책 읽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관광을 하기 위해 혹은 새로운 문화를 접하기 위해 등등)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유럽의 어느 작은 골목길의 허름한 골방에 숨어서 '여행을 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나는 지도에 동그라미까지 치면서 한 곳이라도 빼놓지 않고 유명관광지를 섭렵하는 것이 여행인 줄 알았다. 하지만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낯선 나라의 길들을 왜 그토록 바쁘게 걷고 있었던 것일까. 누가 내어준 숙제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무언가를 봐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나는 '숙소에 누워 있기'도 여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보니 하루 종일 다리 아프게 유명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즐거웠다.

스위스 비엔나 언덕위의 호스텔 도미토리, 이탈리아 포레스테리아 발데세 2층 홀, 폴란드 크라쿠프 할머니네 방

■ 숙소를 여행하는 법

나는 그들을 부다페스트의 그 유명한 체인다리 위에서가 아니라, 여행가이드북에도 나와있지 않은 베제레디가 6번지의 작은 골방에서 만났다. 지구 어딘가의 골목길 모퉁이에 숨어있는 작은 숙소에서 아프리카의 사막을 건너온 사람, 에베레스트산맥을 넘어온 사람을 만난다.

그들을 만나고 떠나보내고 스쳐지나며 나는 세계가 얼마나 넓은 곳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곳인지 가슴 벅차게 느낀다.

여행지의 숙소는 다른 세계에서 온 여행자와 그들이 품고있는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곳이다. 가만히 누워서 마음껏 게으름을 즐기면서 누군가의 꿈을 엿보고 배우고 다시 나의 꿈을 들여다 보는 공간, 한 달 동안 같은 곳에 머물러도 세상의 온갖 언어와 온갖 표정과 온갖 나라에서 실어온 공기들 때문에 단 하루도 똑같지 않은 아침과 저녁을 맞게 되는 공간이다.

나는 관광지 여행 대신 숙소 여행을 시작했다. 아침이 되면 서둘러 관광지를 찾아나서는 대신 같은 방의 여행자들과 두 시간이 넘는 길고 긴 아침식사를 즐기면서 수다를 떤다.

어떤 자세로 누워있는 것이 가장 편한지, 달콤한 낮잠을 위해서는 뜨거운 우유에 꿀 몇 스푼을 넣어 마셔야 하는지, 한국에서는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았으며 전혀 쓸데없게만 느껴졌던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풀어내며 즐거워한다. 그렇게 매일 누군가 만나고 누군가 떠나보내고 누군가로부터 떠난다.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발견한 삶의 소소하고 우연한 감동 때문에 가슴이 벅차기도 한다.

■ 호호할머니의 로망

루마니아 버그 호스텔(위), 폴란드 크라쿠프 할머니네 트램역(아래)

그 할머니를 만난 곳은 폴란드 크라쿠프(폴란드의 옛날 수도, 인근의 아우슈비츠가 유명하다)의 버스터미널이었다. 그곳에는 여행자를 잡으러 나온 민박집 호객꾼들이 시끄럽게 진을 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다른 여행자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민박집 호객꾼들과 함께 사라지고 영어에 서툰 나만 홀로 남겨졌다.

나는 숙소를 찾아야 한다는 막막함으로 잠시 서 있었다. 그 때 나처럼 눈만 끔뻑끔뻑하면서 서 있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키 작은 백발의 할머니였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 집에 가자." 할머니는 분명히 폴란드어로 말했는데 내가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할머니 민박하세요?" 서툰 영어로 더듬더듬 물었더니 영어도 모르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곧 할머니와 손녀처럼 손을 꼭 잡고 트램 정거장까지 한참을 걸어, 다시 트램을 타고 한참을 달려, 크라코프 시 외곽의 한적한 주택가에 다다랐다. 녹슨 초록색 철제 대문으로 할머니는 내 손을 이끌었다. 듬성듬성 이가 빠진 대머리 할아버지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손에 든 채 환하게 웃으며 달려나왔다.

할머니와 내가 공유할 수 있는 말은 딱 두 개였는데, 아침에 샤워할 때마다 할머니가 욕실 문 너머로 외치는 "커피?"와 "밀크?"였다.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지만 우리는 매일 식탁에 마주 앉아서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아침을 먹는 동안 할머니는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지 접힌 자리가 너덜너덜한 크라쿠프의 유명 관광지 브로슈어를 펼쳐서 폴란드어로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가 어디를 꼭 가보라는 것인지, 트램이나 버스를 어디서 타라는 것인지, 다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할머니도 내 말을 갓난아기 옹알이를 알아듣듯 금세 알아버린다. 할머니에게는 전 세게 어떤 언어를 쓰는 사람과도 금방 의사소통을 해버리는 마술처럼 신비한 힘이 있었다.

할머니가 일러준 관광지들을 빠짐없이 정복하기 위해 민박집을 나서면 노부부가 창가에서 손을 흔든다. 또 폴란드어로 무언가 쏟아내는 말이 "차 조심하고, 나쁜 사람들 조심하고, 잘 다녀와…."라는 뜻임에 분명하다.

나를 보낸 후 할머니는 다시 민박집 손님을 찾아 버스터미널로 나간다. 승객이 내리는 버스들을 이리저리 쫓다다니며 하루종일 기다려도 언제나 영어 잘 하는 약삭빠른 민박집 주인들에게 모두 뺏기고 돌아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늘 변함없이 평화로운 그 표정으로 욕실에서 나오는 내 손을 잡아끌어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려주고, 소박하지만 따뜻한 저녁상을 차려준다.

손님이 없어도 이불을 털고 방을 청소하며 하루종일 할머니를 기다리는 이빨 빠진 할아버지와 나처럼 가끔씩 할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어수룩한 젊은이들만으로 할머니는 행복해 보였다.

예전에 내 꿈은 세련된 커트머리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멋쟁이 할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할머니를 만나면서 내 꿈은 바뀌었다. 통통한 항아리 치마에 뽀글뽀글 퍼머머리를 한 호호할머니가 되어 이빨 빠진 배불뚝이 할아버지와 사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여행을 못하게 되면 할머니처럼 서울의 변두리 동네에 작은 민박집을 열고 싶다.

그 작은 민박집에서 또 누군가 자신이 품고온 세계를 꺼내 보여주고, 누군가 함께 그 세계를 꿈꾸면서 행복해 한다. 내가 만든 작은 집에서 지구 오른쪽의 이야기가 지구 왼쪽으로 실어날라지며, 지구 북쪽의 인연과 지구 남쪽의 인연이 만나고 설키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슬며시 행복해졌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가까이 있나 보았다.

■ 미노 약력

<미노의 별 볼일 없는 유럽숙소여행> 저자. 그외 <수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 터키 240+1> <컬러플 아프리카 233+1> . SBS<진실게임><놀라운 대회 스타킹> 방송작가


미노 iljack9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