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급 아마추어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 제주까지 지부창단 요청 바람

“자, 다 일어나 주세요.”

지난 17일 대한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 프란시스홀. 서서히 해거미가 지자 하나둘씩 사람들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7시 정각,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다. 간단한 체조와 발성연습 후 바로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모차르트의 명작 ‘레퀴엠’. 이미 여러차례 파트별 지도를 거친 뒤처럼 합창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사실상 이들에게는 악보조차 이날 처음 받고 불러보는 자리였다. 장엄하면서도 감미로우며 드라마틱한, 웅장하면서도 서정적인 작품. 지휘자의 세밀한 지적과 교정이 덧붙여지면서 화음이 더욱 정교해졌다.

레퀴엠의 매력이 갈수록 풍성하게 살아났다. 연습은 밤 10시반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마치고 돌아가는 복도에서도 사람들은 내내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 저희 합창단은 ‘동아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감정, 우리의 정서를 우리 소리로 전해주는 세계적인 합창단이 되는 게 저희의 목표입니다. 음악적 완성도를 추구합니다.”

■ 세계제패를 꿈꾸는 국내 유일 민간창작합창단

한국창작합창의 열기가 갈수록 뜨겁다.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민간창작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단장 이강숙. 이하 음마)’. 외형적으로는 일반인들로 구성된 아마추어합창단이지만 입단부터 훈련까지 프로성악가들을 방불케하는 수준급 합창단이다. 지난 10일에는 일본 킹레코스사 관계자들이 직접 내한, 음반을 제작함으로써 화제가 된 주인공들이다.

일본과의 음반 작업만 빅터社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일이다. 이들을 표본삼아 배우러 찾아오는 국내외 합창단들도 여럿이다. 한국창작음악 발전에 불을 지피는 ‘본부’가 되고 있다. 서울의 ‘원조’ 음마를 뒤따른 ‘지부’들도 있다.

경기도 수원과 고양, 과천에 각각 동일명의 음마가 결성된 것. 이들 지역 음마의 지휘자들은 서울 음마에서 장기간 활동했던 경력의 전공자 단원출신들이다. 최근엔 제주도에까지 음마 창단 바람이 불기도 했다. 음마의 활약과 따라잡기 열풍이 점점 전국으로, 세계로 번져가고 있다.

홍준철 지휘자는 “현재 국내 음악은 철저히 서양음악 중심, 아니면 국악으로 그 구분이 너무나 확연하고 괴리감이 있다”며 “ 그 두 지점이 중간에 만나는 부분이 없는 현실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좀 더 편안하고 친숙하게 우리 음악, 우리 정서를 담은 우리 음악을 만날 수 있도록 접점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국내창작음악계로서는 특히 중요한 존재다. 아마추어합창단이면서도 매년 정규공연형식으로 서는 무대만 10회 내외, 창단이후 12년동안 이영조, 이건영, 강은수 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의 창작곡 대다수가 이들에 의해 초연됐다.

1998년 이영조 작품발표회를 비롯, 국립국악원 한국창작음악 발표회, KBS 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회, 안익태 기념음악회, 서울시 국악관현악단 40주년 기념공연 협연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만큼 많은 무대에 섰다. 가장 최근에도 지난 4월 작곡가 강은수의 ‘그리운 만남’ 무대를 장식해 아름다운 화음을 선사했다. 청중은 물론 직접 곡을 쓴 작곡가로부터도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얻어냈다.

“ 창작곡은 작곡가 선생님들의 의뢰로 받아서 부르기도 하고, 저희가 스스로 외부에 위촉해 곡을 만들어 부르기도 합니다. 창단10주년 공연때는 시인 황지우 선생님의 싯귀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 시에 곡을 붙여 불렀는데 이를 공연장에서 직접 들으신 황 선생님께서 “원래의 내 시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하셔서 참 뿌듯했던 기억이 있어요. 강은수 선생님의 경우에도 원래 다른 곳에 합창을 맡겼다가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자 다시 저희에게 부탁한 상황이었는데 그때 다들 굉장히 고생은 했지만 나중에 저희 합창을 들으시고는 아주 만족해하시는 걸 보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 일들이 꽤 있습니다.”

음마의 이름은 해외에도 서서히 알려지고 있다.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이미 한국 대표의 창작합창단으로 확고한 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창단 4년만인 2000년 일본 OKI 출반사와 공동주최로 발표회도 가졌다. 2002년에는 대만 타이페이 필하모니 챔버 콰이어와 합동공연, 2003년에는 일본 오쿠보 혼성합창단과 협연을 벌였다. 2006년에도 한국ㆍ필리핀 창작음악연주회로 아시아의 주목을 받았다.

음마의 이름으로 세상에 펴 낸 창작곡 악보집도 2권이나 된다. ‘음악이 있는 마을 시리즈’ 1,2 집이다. 창단 이듬해부터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대회가를 녹음한 것을 필두로, 2000년 KBS 국악관현악단과 협연하며 음반 ‘만수산 드렁칡’ 을 녹음한 것은 물론 독자적 음반인 ‘라자로의 노래’와 ‘음악마을에 피는 꽃 1집’ 을 직접 출반하기도 했다. 외부의 제도적인 재정지원도 없이 홀로 설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이같은 정식 초청연주, 음반 녹음 수익 등 당당한 연주 수익 덕분이다. 순수 아마추어합창단으로서는 흔치 않은 행보다.

■ 소외이웃과 함께하는 음악마을 만들기

음마가 사랑받는 또하나의 이유가 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 때문이다. ‘푸른 나무를 위하여’ 시리즈는 사회의 약자들을 찾아다니는 ‘음마표’ 사회공헌 프로그램이다.

이미 60여회째 진행중.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곳 어디든 찾아다닌다. ‘돈 버는’ 공연 못지않게 그들이 분주한 이유이기도 하다. 창단 이듬해부터 봉천동 철거민 어린이를 위한 연주를 벌였다. 그후 오늘까지 장애아동과 교도소 재소자, 양로원 등은 물론 편견상 일반인들이 접촉조차 꺼리는 나환자들을 비롯해 실직자, 노숙자, 탄광촌 주민들을 위해 공연을 벌였다.

2000년 소록도 우촌기념관에서 있었던 나환우를 위한 공연은 특히 합창단에게도 소록도 주민들에게도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경험이다. 찾아가는 길조차 간단치 않았다. 한참 배를 타고 들어가고도 하룻밤을 묵었다. 어렵사리 공연 준비를 마쳤는데 나환우인 주민들이 아파서 제대로 행사장까지 걸어 들어오지 못했다.

단원 전체가 달려나가 직접 그들을 업고 부축해가며 일일이 모시고 와 자리에 앉혀 드린 뒤 마침내 감동의 공연을 치렀다. 증세가 더 심해 그마저 오시지 못했던 ‘용덕’할머니와의 사연은 더욱 절절하다.

젊은 시절 음악을 전공한 인텔리였던 이 할머니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자마자 아예 합창단이 직접 할머니댁으로 찾아갔다. 낡디낡은 할머니의 집은 너무나 비좁아 단원들이 들어 설 공간조차 부족했다. 방안에, 마당에, 담장 너머에까지 옹기종기 자리를 잡은 채 음마는 할머니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도 울고, 합창단도 울고, 일시에 울음바다로 변해버렸다.

“손에 손수건을 감은 채 초반부터 계속 눈물을 흘리시는거예요. 단원들까지 모두 울고 말았죠. 너무 많이 우시면 안된다고 할머니 눈물을 닦아드리러 가서 손을 잡았더니 손수건에 감긴 손이 (질환으로 문드러진) 토막손이었어요. 눈물을 닦아드리려고 보니 눈에 동공도 없으셨어요. 용덕할머니 공연은 저희가 한 공연 중 그 어떤 공연과도 견줄 수 없는 최상의 연주였어요.(지휘자 홍준철)” “그런 감동은 전공자들이나 프로의 세계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무엇이었어요. 사실 그 전까지 개인적으로 갈등을 했었는데, 그때 소록도 공연을 계기로 ‘내가 머물 곳은 바로 이 자리’라는 확신을 굳히면서 오늘까지 왔어요.(성악전공. 발성코치 신명순)”

다운증후군 자녀를 입양하며 꿋꿋이 살아가는 중증 장애인 부부를 위해 ‘합창 콘서트형 결혼식’을 준비한 일도 한때 언론을 통해 세상에 회자된 바 있다. 음마가 지닌 숱한 사랑의 일화 중 한 편에 불과하다.

■ 이름은 아마추어, 정신은 프로페셔널

음마의 단원수는 현재 40여명. 의사, 약사, 번역작가, 금융인, 전업주부 등 다양한 직종,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돼 있다.

일단 입단하고나면 상당수가 ‘골수분자’로 변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취업적령기의 단원들은 회사 선택시 맨먼저 따지는 조건이 대부분 2가지다. ‘매주 화요일 7시(음마의 정기연습시간)에 무조건 개인 시간을 낼 수 있는 직종일 것, 거리상으로도 언제든 연습장에 빨리 도착할 수 있을만큼 가까운 반경 안에 있는 회사일 것’이다.

이 곳 활동을 위해 전업을 감행한 이들도 있다. 음마의 총무 강형준 씨가 대표적. 음마에 매료된 후 원래의 샐러리맨 생활을 접고 공인중개사로 전업해 생활의 최 중심을 음악활동에 두고 있다.

한 여성 단원은 과거 자신의 과다체중 문제로 단원 전체가 공연의상을 별도로 맞춰입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치자 스스로 25kg를 감량, 또하나의 전설을 추가했다.

음마 5년차의 한 단원은 “이 곳 오기 전만 해도 노래는 노래인 줄로만 알았는데 여기에 온 뒤 노래는 노래가 아니라 살아있는 에너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지휘자 선생님이 이를 깨닫게 해주었고, 이것이 우리를 여기에 묶어두는 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홍준철 지휘자는 “국제 교류 연주를 통해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봤을 때 객관적으로 우리 합창단 수준이 그리 나쁘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앞서는 면도 있다.”며 “조금만 더 열심히 기량을 닦는다면 세계적 합창단이라는 목표가 반드시 허황된 꿈이 아니란 것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며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일본 내 합창단에서 활동한 바 있는 소프라노 파트장 박승애 씨는 “합창강국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 우리나라 환경은 아마추어합창단에 대한 국가적 지원 등 문화정책상 배려가 너무나 빈약해 아쉽다”고 지적했다.

음마는 오는 10월중에 열릴 창작음악발표회에 이어 12월 모차르트 레퀴엠 연주회, 내년 7월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맹연습 중이다. 그 사이사이로도 외부로부터 요청받은 녹음 작업이 예정돼 있다. 그 중 10월의 창작곡발표회에서는 이미 발표한 바 있는 창작곡들의 다시부르기를 시도한다. 홍 지휘자는 “한번만 불리고 사라지는 창작곡들이 많아 안타깝다”며 “단지 새 창작곡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에서 나아가 이것이 자주 불리워짐으로써 국민들이 친숙한 곡으로 따라부를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공연”이라 설명했다.

◇ '음악이 있는 마을'을움직이는 중추 4역

단장 이강숙, 은악감독 이건영(위)
기획감독 홍승찬, 지휘자 홍준철(아래)

음마가 창단된 것은 1996년. 음악평론가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 이강숙 교수와 역시 동 학교 총장을 역임한 작곡가 이건영 교수, 지휘자인 홍준철 현 성공회대 겸임교수의 뜻이 한데 뭉치면서부터였다.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정서를 우리 노래로 담은 한국적 음악으로 세계화’를 일궈내보자는 것이었다.

장고 끝에 마침내 창단을 결정, 첫 단원모집 공고를 내자마자 뜻밖의 이변이 생겼다. ‘더구나 창작음악에 누가 얼마나 오겠느냐’는 이들의 회의적인 염려와는 달리 약 100명이 오디션에 몰려든 것. “우리 자신도 너무나 놀랐다”고 홍준철 지휘자는 당시를 회고한다. 현재 단원 43명. 이들의 오디션은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학력과 종교, 직업 등은 무관. 18세부터 50세까지 누구나 지원 가능하지만, 통과절차가 만만치않다.

오디션 종목은 2가지. 응시자 자신이 직접 준비한 노래 한 곡과 이어서 즉석에서 받은 악보를 보고 무반주로 노래를 부르는 ‘시창’ 테스트가 기본이다. 동참을 원하는 희망자들을 위해 수시모집으로 항상 문을 열어두고 있다.

다음은 독일 프라이부르크 국립음대 및 프랑스 스트라스부르크 국립음대 출신 오르가니스트이자 반주자 박옥주 씨와 함께 음마의 대내외적 상징이자 음악적 기둥 역할을 맡고 있는 핵심주역 4인의 명단이다. (각 사진있음)

단장 이강숙 : 서울대 음대 피아노 전공. 미국 미시간대 음악교육학 박사학위. 전 서울대 음대 교수. KBS교향악단 초대 총감독 역임.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총장. 현 한예종 석좌교수. 음악평론가. 저서 ‘음악의 방법’, ‘음악의 이해’, ‘한국 음악학’,‘음악적 모국어를 위하여’, ‘음악선생님을 위하여’, 소설 ‘피아니스트의 탄생’ 등 다수.

음악감독 이건영 : 서울대 음대 작곡과 석사. 독일 프랑크푸르트 음대 수학, 요한 볼프강 과제대학 수학, 서울대 대학원 미학박사 수료. 전 효성여대, 서울대 음대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역임. 작곡가. 작품 칸타타 ‘분노의 시’,‘오소서 평화의 임금’,‘라자로의 노래’ 등. 가곡집 ‘우리가 물이되어’, 오페라 ‘솔로몬과 술람미’, ‘봄봄봄’ 등. 관현악곡 ‘바리’,‘E음으로부터의 전주곡’,‘청산별곡’,‘저녁노래 1,2’,‘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랩소디’ 등 다수.

기획감독 홍승찬 :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동 대학원 음악학과 석사 취득, 서양음악학 박사과정 수료. 예술의전당 이사.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KBS 교향악단 운영위원. 현 예술의전당 음악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예술경영전공 교수. 출범시부터 창단멤버와 교분을 가져오다 5년전 음마에 본격 합류.

지휘자 홍준철 : 세종대 동대학원 졸업. AILM 국제 conducting 과정 수료, M. Berhmann 사사. 송파구립 합창단, 신흥대 간호대 합창단 지휘자 역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발전기금 사무국장. 현 대한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지휘자. 성공회 대학 겸임교수. 저서 ‘음악이 있는 마을을 꿈꾸며’,‘100번의 성가해설’,‘음악마을 1집’ 등.


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