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항지마다 전혀 다른 문화와 만남에 설레고 선상이벤트·서비스에 즐겁고

2003년 처음 접한 알래스카 크루즈를 시작으로 일곱 차례의 해양크루즈와 두 번의 리버크루즈, 세 번의 탐험크루즈를 경험한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크루즈마니아가 되어있었다.

멋진 이브닝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으로 즐기는 만찬,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공연, 기항지마다 전혀 다른 문화와 만남, 강렬한 태양을 아래서 즐기는 일광욕, 극진한 서비스가 제공되는 크루즈 여행을 지칭하여 뭇사람들은 여행의 꽃이라 부른다.

열두 번에 걸친 크루즈 여행 중 유일하게 꼭 같은 코스에 탐승한 경험이 있다. 바로 지중해 크루즈다. 내가 특별히 지중해 크루즈를 선호하는 까닭은 서구 문명의 발상지부터 화려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도시와 자존심 강한 사람들과 조우가 가능한 동시에.

쪽빛 바다와 파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 위를 유유히 이동하는 유람선 갑판에서 접하게 되는 변화무쌍한 풍광과 호기심 넘치는 이야기, 느림의 미학을 몸과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섬까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유일한 크루즈 코스이기 때문이다.

밤새 아드리아 해를 항해한 호화유람선이 휴식을 위해 닻을 내려놓은 곳은 아테네로 통하는 항구 피레우스다. 여느 때처럼 선택 관광을 포기하고 내 방식대로 여행을 만끽하기 위하여 전철에 몸을 의지하였다. 서구 문명의 출발지인 아테네를 처음 찾은 여행객이라면 너나없이 아크로폴리스로 향한다. 그러나 십여 차례나 아테네 방문경험이 있는 나는 습관처럼 방문객으로 북적거리는 아크로폴리스를 뒤로하고 고고학 박물관으로 길을 잡는다.

그리스 최고 보물창고인 고고학 박물관에는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주요 유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미케네 문명의 상징인 황금으로 제작된 아가멤논의 가면을 필두로 신화 속 주인공인 괴물 미노타우로스 조각, 산토리니에서 발굴된 아름다운 채색벽화, 고대 올림픽헌장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크루즈 매력은 낭만적인 풍경을 간직한 멋진 섬에서 유유자적하며 즐기는 여유로운 휴식도 매력임에 틀림없다. 허나 오랫동안 기억될 만한 유적지를 찾는다면 거두절미하고 고고학 박물관을 먼저 둘러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플라카 지역과 옛 시장터인 아고라를 둘러본 후 아크로폴리스에 올라 저녁놀에 반짝이는 인류의 보물인 파르테논, 에레크테이온, 니케 신전 등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내 나름대로 아테네를 만끽하는 방법이다.

환상의 섬 산토리니, 자유의 섬 미코노스, 자연의 힘을 보여준 나폴리에서 낭만적인 시간을 보낸 승객을 다시금 문명의 숲으로 인도하기 위해 정박한 곳은 로마 외곽 치비타베키아 항구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 로마. 로마에 발을 옮겨 놓는 순간 성 암브로제의 충고를 성실히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암브로제는 친구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라”고. 그의 충고는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유효하다. 나 역시 로마를 찾을 때면 어김없이 지키는 원칙이다.

늘 먼저 찾는 곳은 아침부터 길게 줄을 잇고 있는 바티칸박물관이다. 미니국가 바티칸 시국은 인류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종교 중심지이자 문화 예술의 보고다. 방대한 미술품과 유물이 가득한 바티칸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당대 최고 작품을 접할 수 있다.

바티칸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이나 예술품을 수집하여 전시한 공간이 아니라 자체가 서양 역사와 예술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창작공간인 사실에 그 누구도 토시를 달지 못할 것이다.

독특한 유물과 예술품이 보관된 박물관을 상징하는 공간은 당대 최고 작가들이 합동으로 그려 놓은 벽화가 장식된 중앙 예배당이다.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6명의 화가에 의하여 그려진 총 13점으로 이루어진 시스티나 예배당 중앙 벽화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그림 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로마의 얼굴은 콜로세움이다. 4층으로 이루어진 콜로세움은 각층마다 다른 양식을 띄고 있다. 콜로세움이 완성될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세련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런 콜로세움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훗날 부호들의 저택과 궁전, 성당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콜로세움에 붙어 있던 대리석과 장식물을 때어다 사용했기 때문이다.

로마에는 명소 외도 낭만적인 장소도 즐비하다. 영화무대인 트레비 분수, 스페인 광장을 비롯하여 도시의 발상지인 로만 포룸 등. 볼거리로 넘치는 로마를 찾을 때면 시간제약을 받는 크루즈 여행에 참여한 것에 대한 잠시나마 후회를 갖게 해주는 기항지다.

하루 종일 예술품과 유적지를 둘러본 후 다시 접하게 되는 장소는 낭만적인 문화 예술도시 피렌체다. 신비로운 풍경이 감지되는 토스카나 구릉에 자리한 피렌체는 일찍이 수많은 사상가와 예술의 거장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곳이다. 성 프란시스, 페루지노, 지오토, 미켈란젤로와 보티첼로, 도나텔로 같은 거장들을 탄생시켰고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단테와 마키아벨리를 배출했다.

모든 골목이 영화 속 무대이자 문학의 배경지인 고즈넉한 골목을 걷다보면 마치 내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는 착각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피렌체다. 인간성 회복을 알리는 문화 부흥운동인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꽃피운 피렌체는 시뇨리아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 1㎞ 안에 다양한 문화공간이 밀집되어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기도하다.

낙원은 사리지게 마련이고 그 숫자만큼 새로운 낙원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국경을 마주한 프랑스 남동쪽 코트다쥐르는 좀 다르다.

신의 은총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강렬한 태양과 보석처럼 맑은 해변, 올리브와 레몬 나무가 만들어 내는 그늘, 색의 마술로 불리는 화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다채로운 풍광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코트다쥐르를 대표하는 명소는 카지노와 F1그랑프리 자동차 경주로 유명한 소국 모나코, 정겨운 골목과 낭만적인 해변이 자리한 니스, 영화 도시 칸, 화가의 흔적으로 가득한 생 폴 방스, 그리고 작은 어촌 빌프랑슈까지.

그리고 이름도 없는 아담한 모래사장과 정겨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카페, 눈부시도록 화려한 물건을 판매하는 고급 쇼핑점, 시끌벅적하지만 생기가 넘치는 거리, 팔등신 몸매를 자랑하듯 나신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해변. 이 모든 것이 공존하는 코트다쥐르는 지중해크루즈의 멋진 추억을 선물한다.

긴 여정을 마감하는 곳은 수세기 동안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카탈루냐 사람들에게 있어 정신적인 고향인 바르셀로나이다. 고딕양식의 전매특허인 뾰쪽한 탑과 위풍당당한 외관을 자랑하는 대성당, 신대륙 탐험을 마치고 귀국한 콜럼버스를 뻬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이 맞았던 레이알 마호르 궁전, 각양각색의 꽃문양 모자이크로 장식된 카탈루냐 음악당, 시민들의 휴식처 씨우따데야 공원 등. 명소가 즐비한 도시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장소는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흔적이 녹아 있는 곳들이다.

유명세로 보면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못 미치나 대표작을 꼽으라면 독창성이 총망라된 꽈드랏 도오르(황금의 광장) 지역에 세워진 카사밀라와 구엘공원이 돋보인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울렁이는 파도 같고, 정면에서 응시하면 암벽을 깎아 놓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카사밀라는 공동주택으로 4년 동안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건물로 그의 상상력과 재주가 어느 수준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구엘 공원은 가우디의 자연주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매혹적인 공간이다.

지중해 크루즈 여행의 매력 가운데 호화로운 유람선에서 보내는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선사와 유람선의 규모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지만 매일 40~90개에 달하는 흥미로운 이벤트와 극진한 서비스가 제공된다. 생각만으로도 흥분되는 행사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저녁마다 벌어지는 만찬과 매일 다른 주제로 펼치는 화려한 공연이다. 더욱 거대한 유람선의 경우 뮤지컬 같은 공연을 기본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아이스 쇼까지 펼쳐진다.

지중해를 떠다니는 궁전이란 애칭을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유람선의 으뜸 자랑거리는 지상 어느 곳보다 극진한 서비스를 받으며 즐기는 여유롭고 편안한 휴식과 여가다. 나의 경우도 한 때 이 매력에 푹 빠져 크루즈를 즐겼던 시기가 있었다.

실내외 수영장과 여러 개의 지구지, 카지노, 인라인 스케이트장, 조깅코스, 미니 골프장에 이르기까지. 지상 어느 궁전이나 호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더더욱 매순간 다른 배경지를 제공하는 편안한 객실에서 접하는 서비스와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식단은 탐승객으로 하여금 여행의 진수가 어떤 것인지 피부로 느끼고 눈과 입으로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 이형준 약력

중앙대 사진학과 졸업. 사진작가. 프리랜서 여행작가. <바다 위의 낭만 크루즈 여행><동화를 찾아가는 아름다운 여행><소설과 영화를 찾아가는 일본여행><엽서의 그림속을 여행하다><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유럽 1,2><우리 생애 최고의 세계 기차 여행(공저)> 저자


이형준 heephoto@hanaf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