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문화 공간으로 변한 지식인 사랑방연극·작가와의 대화·영어원서 강독·고전 수업 등 다양한 이벤트로 독자 참여"정통 사회과학 서점을 살리자" 서울대 졸업생 후원회 발족하기도

80년대 성행했던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시대 지식인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사회 논쟁의 부재와 IMF 이후 ‘무차별 경쟁체제’로 경영난을 겪던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일반 서점으로 모습을 바꾸거나 문을 닫아야 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형식의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등장했다. 이들 서점은 작가와의 대화는 물론 연극과 영어원서 강독, 고전 수업 등 다양한 이벤트로 독자들을 끌어 모은다. 블로그와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운영하며 서점의 새로운 소식을 알리기도 한다. 온오프라인 문화포털서비스인 셈이다. 지성인의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하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소개한다.

■ 21세기 문화서점, 대학로 '이음아트'

대학로 동숭아트홀 근처에 위치한 ‘이음아트’는 가장 21세기적인 서점이다. 인문, 예술 등 문화서적을 주로 소개하는 이곳은 베스트셀러와 상관없이 ‘좋은 책’을 소개하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80년대부터 각종 신문의 서평과 신간소개 기사를 스크랩해 온 한상준 사장이 매주 신간을 선택하고 손님들에게 소개한다.

“세계를 바라 볼 수 있고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팔리는 책을 홍보하기 보다는 좋은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의 책 고르는 솜씨는 여느 출판 전문가 못지않다. 조효제 교수의 <인권의 풍경>에서 시작해 강은영의 <스타일 북, 두 번째 이야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이 소개된다. 그러나 그 흔한 자기계발서나 패션 매거진은 찾아볼 수 없다.

“사회과학보다는 인문, 교양, 예술 책을 많이 들여놓았어요. 대학로라는 위치상 작가와 배우 같은 예술인들이 자주 들르게 되더군요. 하지만 예술인들도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하니까 인문, 교양 장르에도 신경을 쓰게 되지요.”

이곳을 찾은 손님 중 하나인 장은서(30) 씨는 “읽을 만한 책이 골라져 있어 편하다”며 한상준 사장을 거들었다. 베스트셀러 위주로 소개되는 대형서점과 달리 자신의 취향에 맞는 책이 있어 고르기 쉽고 놓치고 읽지 못했던 책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이 서점의 장점이라고.

이음아트는 주말이면 연극 등 각종 공연과 작가와의 대화, 낭독회가 열리는 문화공간으로 바뀐다. 2005년 10월 문을 열고 그해 겨울 ‘오늘의 책은 어디로 갔을까?’란 연극을 무료로 공연하면서 자연스럽게 무료 이벤트들이 선보이게 됐다. 신경림, 장정일 등 작가가 낭독회을 열었고, 3년 째 격월로 진행하고 있다.

오는 9월이면 이양구 작가의 희곡을 바탕으로 ‘늘 떠나는 아이(가제)’ 연극을 공연할 예정이다. 격월로 ‘사진 책으로 만나다’란 제목으로 사진 전시회도 연다.

“자주 들렀던 작가나 연출가분들이 이곳에서 공연이나 전시회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손님들은 좋은 행사를 관람할 수 있어서 좋고, 전 서점 홍보가 되니까요. 주말에 행사를 여는 것이 부담이 될 때도 있지만, 행사를 관람하다 책을 사가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득인 셈이죠.”

■ 박성준 교수가 운영하는, 종로 '길담서원'

‘이음아트’ 한상준 대표, ‘길담서원’ 박성준 대표, ‘그날이 오면’ 김동운 대표
'이음아트' 한상준 대표, '길담서원' 박성준 대표, '그날이 오면' 김동운 대표

경복궁 역 2번 출구로 나와 걷다보면 ‘길담서원’이라는 작은 서점을 만날 수 있다. 고전과 인문학 서적을 주로 소개하는 이곳은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NGO학과 교수가 운영하는 곳으로 유명세를 탔다. 인문학과 고전, 환경관련 책들이 주로 소개되고 차와 커피도 함께 판다. 서점 한 편에는 모임을 할 수 있는 세미나 실을 무료로 대여해주기도 한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조용한 북카페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곳의 주인인 박성준 교수는 “이곳은 서점이 아니라 서원”이라고 강조했다.

“이곳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인문학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콩글리시서원, 중국어 고전강독 같은 학술 강연을 하고 인문학 책을 소개하죠. 그래서 이곳은 서점이 아니라 서원입니다.”

박성준 교수가 직접 강연하는 ‘콩글리시 서원’수업은 곰브리치 <세계사>, 노암 촘스키의 와 같은 영어 원서를 읽는 수업이다.

고등학생부터 50대 아저씨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 수업을 듣고 있다. 4개 반이 운영되고 각 수업 당 인원은 10명 안팎이다. 이 밖에도 중국어 고전강독과 명저 100권 읽기 모임 등이 자발적으로 진행된다. 박 교수는 “강연 계획을 인터넷 카페에 공지하면 댓글로 신청하고 선착순으로 인원을 받는다”고 귀띔했다.

주말이면 영화감상과 공연이 수시로 열리는 데, 지난 25일에는 신용목 시인, 심윤경 소설가의 낭독회가 있었다. 배우 백익남과 정유미가 우정 출연해 작품을 함께 낭독했고 북밴의 공연이 이어져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프랑스 파리에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란 영문학 전문 서점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게스트 룸’을 만들어 헤밍웨이와 같은 유명 작가들이 대륙을 오가며 작업할 때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내 주었지요. 나중에 출판사로 발전해 <율리시즈>도 출판하게 됩니다. 중대형 서점 ‘반스 앤 노블’ 역시 서점 안에 카페를 열어 대화의 공간을 두었지요. 우리는 이와 다르지만, 길담서원 역시 획기적인 문화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도 이런 형식의 책방은 없거든요. 자부심을 갖고 있지요.”

■ 사회과학 서점의 고전,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

길담서원(위), 그날이 오면(아래)

앞의 두 서점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인문, 문화 서점이라면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은 80년대 예전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사회과학 전문 서점이다. 88년에 문을 연 이곳은 올해로 꼭 20년을 맞았다. 1990년에 이곳을 인수한 김동운 사장은 1996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전야서점을 인수해 지금의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개업 20년째, 이곳의 ‘북 리스트’ 성향을 바뀌지 않았다. 사회과학 서적 5만 권은 ‘풀빛’ ‘개마고원’ ‘후마니타스’등 출판사 별로 빼곡하게 진열돼있다. 신간 추천 목록에는 최근 동아대 강신준 교수가 칼 마르크스의 독일어 원서를 번역한 <자본> 1-1, 1-2권과 우석훈 교수의 <촌놈들의 제국주의> 등이 적혀있다.

“졸업한 학생들도 가끔 찾아와요. 예전 대학시절 분위기를 그대로 갖고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는 말을 자주 하죠.”

최신 사회과학 도서를 비롯해 80~90년대 희귀자료를 구경할 수 있는 것도 이곳만의 장점이다. 김동운 사장은 절판된 책 중 소장가치가 있는 책 500여 권은 별도로 챙겨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전했다.

98년에는 <그날에서 책읽기>와 같은 무료 서평잡지를 내기도 했고 북카페 ‘미네르바’를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적자로 인해 2000년 잡지 폐간, 2004년 북카페를 폐업했다.

재정난이 계속되자 졸업생을 중심으로 2006년 가을 ‘그날 후원회’가 발족됐다. 그날 후원회는 후원기금 조성은 물론, 한 달에 한 두 번 운영회의를 열어 책 선정과 이벤트 등을 논의한다. 박노자 교수 등 지식인 강연과 서평대회 등 학생들과 함께 하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촛불집회와 광우병 반대 현수막 제작 등으로 사회참여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날’이 학생과 졸업생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다.

“인터넷 서점, 대형 서점들과의 가격 경쟁으로 운영이 예전보다 어려워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손님이나 아르바이트생까지 상호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에서 만나고 소통이 이뤄집니다. 서로 소외되지 않는 일터라는 건 큰 장점이지요. 이런 공간의 소중함이 알려졌으면 합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