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관을 묻는 철학적 대사의 향연

진지하다. 마냥 가볍고 쉽기만을 요구하는 상업적 코미디나 뮤지컬이 대세인 국내 연극계에서 이만큼 진지한 작품을 내놓은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숙한 대업이다. 대사 대사마다 관찰자 자신에게까지 인생관을 반문케하는 담론의 거대한 철학적 무게가 실려있다. 흔치 않은 관객으로서의 경험이다.

“ 난 내 자신이 진실이란 환상에 속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 난 절망의 다른 이름도 알고 있습니다. 용기죠. 무신론자에겐 어떤 환상도 없습니다. 용기와 바꿨으니까요.” (극중 프로이트의 대사 일부)

프랑스 극작가인 에릭-엠마뉴엘 슈미트 작, 심재찬 연출의 연극 <방문자>가 산울림소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다. 한국 신연극 100년을 기념해 극단 산울림이 펼치는 연극연출가 대행진 시리즈의 제2편이다.

심재찬은 영희연극상과 히서연극상을 수상, 2002년 <양파>로 올해의 베스트7, <유린타운>으로 뮤지컬 대상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장르를 넘나드는 많은 역작들로 이름 나 있는 연출가다. 최근에도 제1회 차범석희곡상 수상작인 <침향>을 연출해 호평을 받았다.

프랑스 및 국제 문학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소설가 겸 극작가 중 일인으로 손꼽히는 에릭-엠마뉴엘 슈미트의 작품을 연극으로 풀어낸 이번 <방문자>는 여실히 심재찬답다. 군더더기없는 얼개와 전개법이 돋보인다.

내용은 구체적이면서도 관념적으로 방대하다. 나치의 유태인 사냥이 자행되던 1938년의 비엔나가 배경. 나치의 오스트리아 침공과 유태인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미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망명을 거부한다.

그러나 어느날 밤, 갑자기 찾아든 게쉬타포가 자신의 딸 안나를 잡아가며 망명신청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좌절에 빠진 프로이트 앞에 홀연 미지의 남자가 환영(幻影)처럼 나타난다.

세련된 턱시도 차림에 냉소적인 화법으로 프로이트를 연신 심연 속에 빠뜨리는 이 남자의 정체는 실로 모호하다. 그는 끊임없이 예리한 질문을 던지며 프로이트 자신이 평생 지녀온 철학과 자기확신의 세계를 일시에 혼란 속으로 밀어넣는다.

작품의 핵심은 외형적 스토리가 아니라 주로 이 정체불명의 ‘방문자’와의 대화에 숨어있다. 언어적 표현은 쉽지만 그 안의 메시지가 가진 무게는 적잖이 무겁다. 대화는 템포 빠르게 진행된다.

거의 모든 대사마다 은유와 비유, 상징이 얹혀있다. 공연이 진행될 수록 주제가 진중하게 와 닿는다. 말한대로, 간결하며 명료한 구성과 속도감있는 극의 전개가 무대 몰입도를 높인다. 배우 이남희와 김수현, 김은석, 이혜원이 출연해 각각 프로이트, 미지의 남자, 나치대원, 안나 역으로 열연, 말끔한 연기를 펼친다.

다소 아쉬움이 있다면 초반부의 ‘워밍업’에 대한 것이다. 공연 처음부터 바로 호흡을 따라잡기가 관객으로서는 다소 숨가쁠 수 있다. 극 초입의 대사 템포, 여백을 조금 두어본다면 어떨까. 물론 주제 자체로도 무거운 외국어 원작을 우리 무대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만만찮은 이중부담의 고충 또한 느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가벼운’ 시대에 이만한 정극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객석에서는 반갑고 감사해 할 일이다. 극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지성의 깊이를 위해서도 환영할 만 하다.


정영주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