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 창단·강수진 배출 등 눈부신 발전 뒤 2% 부족한 환경

한국 사람들이 처음 알게 된 발레리나는 안나 파블로바다. 1914년 3월 14일자 매일신보에 난 “로세아 파블로 부인이 영국 론돈에서 크게 흥행중”이라는 기사를 통해서다. 그러나 안나 파블로바가 한국에 온 적은 없었고, “무도의 기술은 로세아가 세계에 엇듬인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러시아 사람들이 한국에서 직접 발레를 가르친 것은 그로부터 80여 년 이후의 일이다.

한국의 발레는 일본을 통해 시작되었다. 해방기에 귀국한 한동인. 정지수 등은 그러나 전쟁과 함께 피랍 혹은 월북했다. 1950년 6월 25일은 1946년 한동인이 만든 서울발레단의 제5회 공연 날이었다. 공연은 무산되었고, 그 시절의 단원 임성남이 전쟁기에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2002년 사망 시까지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며 계보의 맥을 이었다.

한국 발레는 현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국제화. 세계화 바람이 유행이던 1990년대에 우연히도 러시아가 개방되어 한국인 발레전공자들이 유학을 가고, 그곳 교사들이 한국에 상주하면서 다수의 학생들이 급속한 성장을 지속하게 되었다.

물론 1984년 창단된 유니버설발레단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1976년 미국인 애드리엔 델라스가 선화예중 발레 클래스를 통해 현 단장 문훈숙, 서울 발레시어터 단장 김인희,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 강수진, 독일 뒤셀도르프발레단 지도위원 허용순을 배출했다. 전문적인 발레교육제도에 대한 인식, 작품 저작권에 관한 관례 등 국제화된 규범을 한국에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역대 예술감독인 애드리엔 델라스, 다니엘 레반스, 로이 토비아스, 부르스 스타이블, 올레그 비노그라도프를 거치며 고전발레 작품을 섭렵한 이후, 최근에는 장-폴 콤린, 오하드 나하린, 나초 두아토, 크리스토퍼 휠든 등의 컨템퍼러리 발레도 적극 도입하며 명실 공히 국제적 발레단의 면모를 갖췄다.

90년대 후반에 개원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역시 각종 국제무용콩쿠르에서 수상 빈도와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 최근 이탈리아 콩쿠르 주니어 부문에서 남. 여 각각 금상을 수상했으니 시니어 부문으로 연결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유니버설발레단이 미국에 설립한 ‘워싱턴 키로프 발레아카데미’ 역시 세계적인 발레무용가들을 다수 배출했다. 동 발레단 주역 엄재용과 아메리칸발레시어터 단원 서희가 그 출신이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발레리나는 강수진일 것이다. 그러나 파리오페라발레단 솔리스트 김용걸 역시 그에 못지않은 능력의 소유자다. 김용걸은 성균관대학 출신으로 국립발레단을 거쳐 파리로 진출했다. 그를 키운 한국인 선생들은 한국의 대학교육과 함께 80년대에 미국 연수를 거친 사람들이다. 대학의 발레교육이 전문교육과 수준을 같이 할 수 없기 때문에 김용걸은 대학발레의 등대 같은 존재다.

이처럼 화려한 발전상에도 불구하고 한국발레 환경이 최선. 최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타깝다. 우선은 큰 틀의 체제에서 전문적 시각이 부족하다. 불완전한 전문교육제도, 군면제의 모순, 잦은 단장교체 등이고, 발레계 내부에서도 국제무대에서 통할 안무가 육성 같은 주요과제에 대해 숙고해야한다.

유니버설발레단 '발레 뮤지컬 심청'

국립발레단의 가장 큰 문제는 빈번한 단장교체에 있다. 90년대 개혁바람과 함께 불과 15년 만에 김혜식. 최태지. 김긍수. 박인자, 그리고 2008년 다시 최태지 단장을 맞았다. 임성남 단장이 1962년 국립무용단 시절부터 30년간 재임했으니 첫 교체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업발레단 예술감독은 발레를 전공했다고 해서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강수진이나 김용걸처럼 직업단체에서 성장한 사람들 중에서, 수석무용가 같은 최고계급 출신 중에서, 지도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정하는 것이 국제적 상식이다. 그런 인재는 러시아나 미국 같은 곳에서도 찾기가 어려워 한 사람이 십년 이상을 하는 것이 관례다.

발레단에 입단할 소수정예 교육제도가 전무한 것도 문제다. 강수진을 선두로 한국 국립발레단 김주원,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김지영 등등 수많은 학생들이 중학생 시절부터 타향살이를 시작한 결과 오늘의 스타로 부상했다. 실패한 소녀들은 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과정을 ‘발레학교’로 인가하면 모든 문제가 지금보다 수십 배 쉬워질 수 있다.

최근 무용계의 관심거리인 군대면제 개선안은 특히 문제가 크다. 체육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받은 것처럼 외국 콩쿠르에서 입상하라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다면 유사한 수준의 시설과 국비를 지원해야 해외 체류비용 없는 학생도 발레를 할 수 있겠다. 그것이 어렵다면 국내콩쿠르 금상 수상자를 지원했던 기존의 방식이라도 유지해야 한다. 발레에서는 남자 주역무용가의 수명이 길어야 15년 정도다. 그중 회복기를 포함한 5년을 감해주는 것은 일반인의 수명에 전성기 20년을 보태주는 혜택이다. 김용걸이 바로 그 수혜자다.

마지막으로 발레 스타들에 걸 맞는 안무자 육성도 시급한 문제다. 발레는 기본기 훈련이 먼저고, 다음으로 고전 레퍼토리 습득이며, 마지막으로 자국의 고유한 시각을 지닌 안무자들이 창작한 작품으로 국제무대에서 저작권을 인정받는 발전과정을 거친다. 현재 한국발레의 가장 큰 과제는 안무다. 외국에서 안무비를 받고 작품을 만든 발레계열 작가로는 제임스 전과 허용순이 전부다.

모리스 베자르발레단 출신 제임스 전은 김인희와 함께 1995년 이후 서울발레시어터를 이끌며 미국 네바다 발레단에서 지속적으로 안무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모나코로 떠나 유럽에서 활동해온 허용순은 2007년 독일 슈베린컴퍼니와 호주 퀸즈랜드 발레에서 안무했고, 올 여름 서울 발레엑스포에서는 미국 툴사발레단과 <이것이 인생이다>를 한국 초연했다.

한국 발레는 현재 전 세계의 발레를 흡족히 향수하는 후발 주자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프랑스의 발레교육과 공연제도를 러시아가 고스란히 계승. 발전시켜 결국에는 다시 프랑스에 역수출했던 기간을 압축하면 대략 184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로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에서의 발레 발전이 언제 최고의 결실을 맺을 것인가를 점치는 기준이 되는 역사다. 물론 교육제도, 발레단 운영, 안무자 육성이 최상의 상태로 조화를 이룬다는 전제 아래서다.


문애령 무용평론가 mar5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