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색과 여러 장르·기법 구사 현대·미래형 작품으로 탄생

“고여있기보다는 흐르는 물이 되고 싶었어요.”

서공임(48) 화백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의 대표적 현대민화작가다. 민화를 그린 지 올해로 30년째. 전통민화에서 출발해 대담한 색과 여러 장르, 기법을 구사하며 우리의 민화를 재해석, 재창작해왔다. 소재는 옛것이지만, 그의 손을 거친 민화의 내용은 현대 또는 미래형이기마저하다.

회화에서는 서양화에 가까우리만치 강렬한 인상을 주는 다양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재료도 각양각색으로 개발해 쓴다. 한지에서부터 구긴 종이, 캔버스는 물론 스테인레스, 알미늄 등 그의 호기심이 닿는 모든 것이 민화를 안고 새 작품으로 탄생한다.

특히 서 화백이 그린 꽃은 의상디자이너들과 연예인, 저명인사들 사이에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한복에서부터 양복, 이브닝드레스 등 유명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에도 여러차례 그의 그림이 멋진 의상으로 선보였다. 디자이너 장광효와는 10년 이상 함께 작업했다. 서 화백이 꽃 그림을 그려넣은 그의 의상은 특히 유명하다.

인기 연예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롱런 히트작이기도 하다. 한복으로는 故 허영 선생의 패션쇼를 통해 다수 선보였다. 모 고위 공직자 부인들의 한복에도 꽃 그림을 그려준 바 있다. 가장 멀리로는 제네바의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실에 그의 그림 한 폭이 크게 걸려있다. 언젠가 스페인 왕비가 내한한 당시에도 서 화백의 그림이 선물로 건너갔다.

“어디, 무엇에든 민화를 이용할 수 있어요. 옷, 카드, 엽서, 스카프, 브로치 등 거의 안 만들어본 게 없어요. 궁중음식전문가인 한복려 선생님과도 민화에 나오는 식재료들로 그림을 그려 책이나 엽서에 쓰시도록 한 적이 있어요. 패션쇼의 무대 배경으로도 제 그림이 사용되기도 하고, 얼마전 미스코리아대회 베트남 방문행사때에는 제가 그린 호랑이 그림 부채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어요. 그런 모든 작업들이 사실 처음에 만들땐 힘들긴 해도 차츰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되돌아보니 민화로 즐거움을 주며 사람들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크게 성취감을 준 일들이었다는 것에 참 감사하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그림이 아니면 내가 뭘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만큼이요.”

어릴적부터 소녀의 꿈은 화가였다. 친구들의 부탁을 받아 대신 그림을 그려주곤 했다. 19세에 들던 해 평소처럼 그림 그릴 재료를 사러 화방에 들렀다가 우연히 포스터를 발견하면서 작가의 운명이 시작됐다. 민화수강생을 모집한다는 벽보가 붙어있었다.

“무작정 전화를 걸고 찾아갔더니 어릴 때 많이 봤던 그림, 대청마루나 벽장문에 붙어있던 낯익은 그림들이었어요. 그날부터 바로 출근하기 시작해 바닥청소도 해가며 도제식으로 민화를 그리며 배웠어요. 특히 동양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제 적성에 잘 맞았죠. 그리고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진득히 오랫동안 뭔가에 몰입하기를 좋아하는 제 성격에도 딱 맞았고요. 그렇게 7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단지 같은 그림을 베껴 그리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자신만의 새로운 무엇을 끊임없이 찾아나섰고, 발견했다. 그리고 1996년 생애 첫 전시회를 가졌다. <민화 전승작업의 오늘과 내일>전이었다.

“저는 과거와 똑같은, 그런 ‘전통민화하는 사람이야’ 하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었어요. 그래서 뭔가 새롭고 다른 민화를 하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원래의 그림을 제 나름대로 재해석해보기도 하고, 재료를 바꿔서 또다른 느낌을 만들어보기도하고, 1996년 첫 전시 도록을 자세히 보시면 그때 이미 흔히 ‘전통’민화만이 아닌 저의 독특한 작품들을 여럿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1998년은 특히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해다. 현대백화점의 의뢰로 호랑이 그림 100점을 내 건 <호랑이展>을 열었다. 민화작가로서는 전대미문의 시도였다.

현대의 색과 형상을 타고 태어난 이 파격적인 호랑이 민화 전시회는 일시에 세간의 대화제가 됐다. 신문, 잡지, 방송 할 것 없이 언론의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더욱더 반향이 증폭됐다. ‘서공임 민화’의 독특한 창의적 세계가 알려지면서 그의 작가적 입지도 확고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10년을 들여 준비한 전시회였다.

“호랑이에게는 특히 애정이 더 커요. 제게 행운을 가져다 준 동물이거든요. 워낙 준비 기간이 길다보니 처음에는 다들 ‘미친거 아니냐, 그게 되겠냐?’고도 했었죠. 한편으론, 호랑이뿐 아니라 닭이든 뭐든 그리려고 자료를 찾아보면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그래서 그때 생각한 게 ‘나 자신부터라도 먼저 호랑이를 많이 그려두면 나중에 후배들에게라도 자료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밀고 나간거죠.”

완벽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스스로 고생을 자처하는 일도 많다. 민화의 특성상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그릴 준비에 소요되는 시간이 더 많다.

완제품 형태의 물감을 사서 바로 쓸 수 있는 서양화와는 달리, 민화는 필요한 색가루를 직접 빻고 다시 체로 걸러내는 등 여러 번거로운 단계를 거쳐가며 최대한 곱게 분말을 만들어 이를 아교와 섞어 써야한다. 우유처럼 곱게 개어져야만 발색이 좋아진다.

“가루를 아교와 섞어서 개는 일까지 모두 손으로 직접 하는데, 그러다보면 손이 다 트지요. 어떨 땐 하루종일 물감만 개는 날도 있고, 어떨 땐 화공약품 도료를 써보려다가 신나때문에 혼이 난 일도 있어요. 프레스코처럼 석회를 사용해 그림을 그릴 때는 손으로 석회반죽을 개다가 손이 데인 적도 있어요. 석회를 개어 반죽을 하면 거기서 열이 발생하거든요.”

연중무휴, 하루 평균 16시간 작업. 그나마 며칠이라도 쉬어본 건 지난 30년을 통틀어 올 여름이 처음이었다.

“제가 작업중독증이 있어요. 붓을 안 잡고 있으면 뭔가 내내 불안해요. 하루라도 작업을 안하면 안절부절하고, 놀더라도 꼭 작업실에 나와 있어야 마음이 놓여요.”

그의 민화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평면과 입체가 자유자재로 입장한다. 직접 커피를 볶아 마실 때가 유일한 여가이자 휴식시간인 그는 한때 커피로 민화를 그리는 커피페인팅 작품도 선보인 적 있다. 그러나 쉬는 시간도 이제 그만. 얼마전 베이징과 서울을 교대로 왕래하는 대규모 한,중 교류전시회를 마치고도 현재 또 다른 작품의뢰를 받아 한창 작업 진행 중이다.

“그림도, 옷도, 그 어떤 작품도 사실 저 혼자만으로 된 일이 아니라 주변에서 제게 좋은 기회를 주신 분들이 많았던 덕에 이까지 온 것 같아요. 제가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 복을 다시 후배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그리고 워낙 세필의 정교한 민화를 수십년 그리다보니 제 시력이 많이 나빠요. 시력이 또 더 나빠지기전에,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 최대한 작품을 많이 그려놔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고 있습니다.”

■ 박스 : 서공임은?

동국대 불교대학원 예술사학과 수료. 2003년 한국 국제아트페어 출품, 2005년 한국일보사 초대전, 2008년 북경올림픽 성공개최기원 한중 교류 초대전 등 개인전 및 초대전, 단체전 다수.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심사위원, 동방대학원대학교 서화예술학과 겸임교수 등 역임. 현재 (사) 우리민화협회 대표이사. 동국대 및 연세대 사회교육원 출강 중.


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