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은 살아났고 모던 보이는 달아났다식민지 인물의 정체성 흐려진 자리에 채워진 멜로 서사와 스펙터클

한 편의 영화는 첫사랑과 첫경험같은 기억할 만한 만남을 제공한다. 개봉작을 첫날 감상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에게는 10년 만에 연락이 된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약속장소로 향하는 설레임과 비슷한 감정이 생긴다.

이 긴장감은 영화라는 텍스트를 만나는 기대감으로 만들어진다. 대중예술 미학자 박성봉은 예술을 “밥상을 차리는 이와 밥상을 받는 이 사이의 무한한 열림의 만남”이라고 했다.

밥상을 차리는 제작자와 감독들과 무수히 많은 스텝들은 나름의 정성과 성실성으로 한 편의 영화라는 정식요리를 마련할 것이며 극장을 찾는 관객은 여러 매체에 집중적으로 소개된 리뷰와 인터뷰 그리고 감독과 배우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 편의 영화라는 요리를 섭취한다.

그리고 사법고시의 합격 소식을 들었던 순간만큼 강렬한 기억에 남은 영화와 수많은 하객들이 모인 연회장에서 간단한 악수를 하고 지나치는 인물에 대한 기억 정도만 남기는 영화로 나눈다.

전자는 문전성시로 환영받게 되며 후자는 관객의 외면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하는 영화도 상당수 존재한다. 이들 영화에 대한 언급과 평가는 상당한 신중함을 요구한다. 정지우의 <모던 보이>는 바로 언급하기가 조심스러운 대표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관객과 평론가가 가장 주목하는 서사는 별 무리없이 끝까지 잘 흘러간다. 연기도 주연급 모두 양호하며 촬영과 편집은 더욱더 나무랄 대목이 없을 정도로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박해일의 연기는 한 시대의 로맨티스트와 식민지 백성이지만 남부러울 것 없이 풍류를 즐기는 한량의 캐릭터를 그 시대의 거리에서 스크린으로 끌고 오는 듯 한 착각이 들 만큼 잘 소화했다.

김혜수의 레지스탕트와 팜므파탈을 결합시키는 연기도 평균점을 웃돌았다. 촬영은 감정을 만들어내고 프레임을 아름다운 비주얼로 채워넣는데 전념하였으며 시나이로는 한량이 사랑하는 여인을 통해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무리없이 이어갔다.

그리고 보다 돋보이는 압권은 1930년대 후반 경성 공간을 실감나게 재현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과거 공간이 주는 스펙터클은 칼라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을 맛보게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의 표정은 그다지 환하지는 않았으며 필자 또한 허전한 공복감을 맛보고 있었다.

잘 차린 뷔페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서 귀가한 다음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불현듯 전해오는 그 허기와 허전함과 닮았다. 이 글은 그 허전함을 찾는 숨은 그림찾기의 일종이다.

우선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모던보이다. 모던 보이 이해명(박해일 분)은 직업이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이며 ‘나라를 뺏긴 것은 참아도 애인을 뺏기고는 못사는 인간’이다. 그는 우연히 여자 조난실(김혜수 분)을 만나고 이름도 많고 직업은 더 많은 여자에 매혹되어 인생이 바뀐다. 모던 보이는 경성의 한량에서 항일저항기의 독립투사로 변신한다.

여기까지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재편성한 이야기의 전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야기 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경성이라는 공간이며 모던보이의 복장과 삶의 방식이며 핸드 헬드 카메라로 찍은 컷들을 이어붙인 편집과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공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살려낸 영화 테크롤로지의 빛나는 기여다.

정지우 감독은 인터뷰에서 ‘공간은 네 번째나 다섯 번째의 주인공’이라 할 만큼 공들였으며 영화 속의 경성의 공간은 생동감 있었다. 명동성당과 경성역과 조선총독부는 구체적인 설명 자막까지 첨부되어 사실적 재현에 대한 자신감을 표명했다. 이 영화는 분명 일제 강점기 경성 공간의 성공적인 재현과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제작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테크롤로지의 미학과 서사의 안점감에도 불구하고 빈 공백이 있는 이 작품의 평가는 어떻게해야 하는가. 대중예술의 미학적 자는 무엇이고 대중영화는 어떤 평가의 저울을 올려놓아야하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불현듯 부산영화제 개막작 <스탈린의 선물>을 떠올렸다. 스탈린 치하 추방된 인간들이 경찰과 군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폭력아래서도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고 공조하면서 사랑하는 인간의 삶이 꽃처럼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폭력적 정치와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은 극명하게 대비되고 억압과 고통 속에서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시같은 대화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모던 보이>는 억압의 시대와 고문의 풍경은 보이지만 구체적인 식민지 인물들의 자존감 지키기와 상호 친밀한 공조와 연대가 상대적으로 희미했다. 그 시대의 인물의 진정성과 정체성이 흐려진 자리에 채워진 멜로의 서사와 스펙터클은 잘 포장된 포장지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즉 식민지 경성은 스펙터클을 상품화하는 위험에 빠졌다.

역사의 사실과 역사 속에 숨쉬는 인물의 공기는 사라지고 역사의 배경으로 스펙터클이 자리할 때 화면은 공허해진다. 이와 같은 진지함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은 코미디적 인물과 상황으로 대중과 소통의 시도로 귀결된 것 같다. 여기에 잘 만든 영화의 공백이 있었던 것이다. 이 공백 채우는 것은 정지우와 한국영화가 고민해야 될 공동의 숙제이다.



문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