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여파 관심증폭… 드라마적 허구성 경계해야

이정명 원작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인기를 끌면서 주인공인 혜원(蕙園) 신윤복(1758~?)의 삶과 작품에 대한 관심 역시 증폭하고 있는 가운데, 작품의 가치는 재조명하되 그의 삶의 묘사에 있어 허구성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 신윤복이 '국민 여동생'(?)

<바람의 화원> 원작과 드라마에서 ‘팩션(faction. 사실을 토대로 한 소설)’ 형식을 빌어 신윤복을 여성으로 묘사한 것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는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는 배우 문근영이 남장여자(신윤복 분)로 출연하고 있다.

홍선표 이화여대 대학원 교수는“남장 설정으로 이런 비판을 피하려는 의도를 인정한다 쳐도 역사적 인물의 실명을 그대로 쓰며 소설을 쓰는 것은 역사 왜곡”이라고 꼬집었다.

그가 ‘화원’이었다는 점은 이런 비판의 근거 가운데 하나다. 신윤복이 활동했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르네상스’기로 불리는 개혁군주 정조의 시대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화원으로 활동할 수 없는 유교사회였다.

신윤복의 작품을 살펴봐도 이런 변형은 무리라 할 수 있다.

흠모하는 대상을 작품의 표현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당연한 욕구인데 기녀를 비롯해 아름다운 여성을 주로 그린 신윤복이 여자일리 없다는 것이다. 타계한 미술사학자 오주석 씨는 <한국의 미>란 책에서 신윤복의 작품 <미인도>를 두고 “화가들은 갖고 싶은 것을 그리게 마련”이라며 이는 “구석기 시대에 원시인들이 동굴에 들소를 그린것과 같다”고 썼다.

■ 단원 김홍도와의 관계

극중에서 사제지간, 혹은 애정관계로 나타나는 단원(檀園) 김홍도(1745~?)와 신윤복의 사이에 대한 설정 역시 뚜렷한 근거가 없다는 지적이 있다. 두 작가가 동시대에 활동했고 모두 풍속화를 그렸다는 점에서 이런 추측을 하고는 하지만 사료로서 증명된 바는 없다는 것이다.

작품분석에 따라 이런 관점은 엇갈린다. 김홍도가 서민층을 주로 그린 반면, 신윤복은 양반을 주로 그렸다. 김홍도는 남자를 주로 그렸고 신윤복은 여자를 주로 그렸다. 김홍도의 경우는 단순하고 힘 있는 먹선 위주인데 반해, 신윤복은 세련되고 셈세한 필치로 화려한 채색화를 그렸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둘의 관계가 예사수준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같은 인물과 풍경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그 근거다. 김홍도의 <우물가>와 신윤복의 <정변야화>, 김홍도의 <빨래터>와 신윤복의 <계변가화>는 등장인물의 옷차림, 동작 등이 비슷하다.

그러나, 낮과 밤, 중인과 양반, 배경의 유무 등으로 각자의 화풍을 드러내고 있다. 양반집 여인과 승려의 동침을 그린 <춘화> 역시 매우 비슷한 그림이다. 안휘준 위원장은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단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혜원은 화풍이 가깝고 서체가 비슷하며, 활동연대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김홍도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 '무자료'가 원인


이런 지적들은 ‘무자료’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도화서 화원이었으나, 속화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후문만 떠돌 뿐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근역서화징(1928)에 나오는 두 줄이 혜원에 관한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신윤복. 자 입보(笠父). 호 혜원(蕙園), 고령인(高靈人). 부친은 첨사(僉使) 신한평(申漢枰).

화원(畵員).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

강관식 한성대 교수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신한평(1726~?)은 영조, 정조, 순조 초년에 궁중의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으며, 초상화와 속화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바로 이점이 혜원이 관가의 화원으로 일할 수 없었던 이유라는 설명도 있다. 이원복 국립전주박물관장은“부자가 화원이라도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직장에 동시에 근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들인 신윤복이 뛰어난 기량을 갖고도 도화서에 속하지 못해 기록이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윤복이 40여년 넘게 ‘아웃사이더’ 작가로 활동한 이유다.

■ 혜원,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의 숨겨진 의미 역시 신윤복에 대한 갖은 상상과 추측을 불러 일으킨 원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작가의 의도에 관한 분분한 해석과 억측을 낳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과부>는 상복을 입은 여인이 개가 짝?기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것이 “과부의 억압된 성(性)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월하정인(月下情人)>에서는 한밤중 통행금지 시간에 은밀하게 만나는 남녀를 그려넣고 “달빛 침침한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라고 써넣었다. <기다림>으로 불리는 작품에서는 한 여인이 송낙을 쥐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송낙은 당시 승려들이 머리에 쓰던 모자와 같은 것이다.

<미인도>는 혜원의 미스터리적 면모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림의 주인공은 옷고름 위에 손을 얹고 있으나 풀고 있는지 확실치 않다. 오른편 속옷고름의 연지빛이 도드라진다.

편안한 눈빛을 하고 있지만 앞에 있는 남정네 앞에서 치마 끝의 매듭을 풀려는 것인지, 아니면 일을 끝내고 홀로 저고리를 벗고 고단한 몸을 추스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꿈꾸는 듯한 눈매로 봤을 때 주위에 남자가 있지는 않은 듯하다는 게 <한국의 미 특강>에 나온 오주석 교수의 설명이지만 남자 앞에서 옷을 벗는 기녀를 그렸다는 주장도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대부분 이런 분분한 해석의 차이를 부르는 작품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가 “단원의 풍속화는 무엇을 그렸는지 이해가 가지만 혜원의 그림은 갑갑하기 짝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 혜원은 풍속화가인가
산수·사군자·동물그림·글씨 등 다방면에 작품 활동


신윤복 '묘견도' 이대박물관

교과서를 통해 풍류와 해학의 풍자적 작가로 알려진 것과 달리 혜원(蕙園) 신윤복(1758~?)은 구매층의 구미에 맞춰 작품활동을 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풍속화가로만 규정짓는 것은 잘못이라는 해설이 있어 주목된다.

고등학교 <미술사> 검정교과서(교학사)에서는 신윤복을"풍속화가로 한량과 기녀들의 생활모습, 해학을 풍류적으로 표현했던" 작가로 설명하고 있다. 민화 소개가 바로 이어지는 지면 구성 역시 일반인이 신윤복을 김홍도와 더불어 양반사회를 풍자하는 고발적 화가로만 기억하게 하는 이유다.

하지만, 혜원의 작품은 풍자나 저항의 의미보다는 수요자의 취향을 고려한 작품생산 여건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신윤복이 활약한 18세기 후반은 사회 전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던 격동의 시대였다.

일본, 중국과의 본격적인 중계무역으로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한양(서울)이 하나의 도시적 면모를 갖추던 때였다. 당시 관리들은 늘어나는 돈을 횡령하고 축재해 유흥풍조를 일으켜 기생문화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됐다. 새로 부상한 중인계층을 중심으로 한 미술품 구매자의 문화적 취향이 그리 고답적이지 않았을 것은 당연지사다.

신윤복이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풍자적 작품을 그렸다기 보다는 미술품 구매층의 취향에 맞춰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시대상을 그렸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 지적이다.

홍선표 이화여대 대학원 교수는 "당시는 주문, 제작이라는 단선 라인에 의해 미술품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미술이 대중화 되지 않은 시기"라며 "혜원 역시 소비계층의 풍류양상을 그대로 그려, 그들이 즐거울 수 있는 작품을 주문에 의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풍속화만 그리지 않았다는 점 역시 우리가 잘 모르는 혜원의 단면이다. 실제로 신윤복은 풍속화 외에도 산수, 사군자, 동물 그림, 글씨 등 다방면에 재주가 있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다양한 작품활동을 했다.

이원복 전주국립박물관장은 "혜원이 사회에 저항하고 고발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며 "자기 관심이 쏠리는 분야를 그려놓고 보니까 결과적으로 사회고발적 성격 있었지만 시대상을 자기 나름대로 보고 솔직하게 표현한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보는게 옳다"고 말했다.

혜원에 대한 변치 않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조선화단에 남을 천재작가였다는 점이다. 그의 섬세한 필치와 치밀한 구도상의 논리성, 화려한 색감, 뚜렷한 주제의식은 단원 김홍도와 함께 한국화단에 하나의 충격이었다.

이원복 관장은 "생전에 이런 점을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그림 양식은 개인의 미술양식을 뛰어넘어 시대의 양식이 됐다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신윤복을 따라한 '춘화'가 끊임없이 복제됐던 이유다.

조선의 시대상과 '사람'을 그대로 그려냈다는 것 역시 신윤복의 가치다. 신윤복은 양반이나 귀족 등의 초상을 제외하고는 산수나 사군자를 주로 그렸던 조선의 화단 분위기를 탈피해 기녀, 한량, 상인 등의 일반인을 그렸다. 인간의 모습이 그림의 전면을 차지한 조선미술사의 기념비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