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 이후 풍속화 및 성풍속도에 큰 영향춘화 그려 도화서 쫓겨났다는 기록 없어

‘일반적인’ 관람객이 아니었다. 길게 늘어선 행렬에는 뭔지 모를 야릇한 흥분마저 감돌았다. 느리게 줄어드는 입장객 들 뒤로 속속 늘어나는 기다란 줄에 숨죽인 탄성이 절로 나왔다.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씩 열리는 간송미술관 전시회에 찾아가곤 했던 필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개장시간인 10시경에는 여유있는 관람이 가능하리라 믿고 일행을 기다리느라 정문 앞에 서 있었는데 좁다란 골목길 어귀로부터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명색이 한국회화사 전공인 필자의 질문에 대한 일행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바람의 화원 덕이잖아…”

TV드라마 하나로 이런 효과가 있을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명색이 회화사 전공자라 하면서도 전공분야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챙겨보지 않은 직무소홀(?)을 자책하는 한편 우리의 전통문화에의 갈증과 열망이 이토록 크다는 점에 우선 감탄했다.

잘만 포장하고 각색하면 전통문화도 상업적 성공을 기대할 수 있겠구나 하는 얄팍한 계산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과도한 ‘열기’가 두렵기도 했고 과연 적절한 이해에 기반을 둔 관심인가를 냉정히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 18세기라는 시대

단답형 정답을 요구하는 우리네 풍토에서 조선후기 진경산수화가는 정선, 풍속화가는 김홍도와 신윤복이다. 부연하자면 정선은 줄곧 진경산수만을 그렸고 김홍도는 수묵으로 서민의 생활상을 그렸으며 신윤복은 채색으로 여인들의 일상을 그렸다는 정도가 이 방면에 대한 대체적인 인식이라 여겨진다.

특히 신윤복은 기녀 등 여인들의 모습을 잘 그린데다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포르노그래피라 할 수 있는 춘화(春畵)를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대중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화가 덧붙여져 더욱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정선이 오직 진경산수만을 그리고 김홍도가 서민의 생활을 그린 것을 서민의 대변자로 평가하고 신윤복이 기녀와 한량들의 세계를 그린 것만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협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없다.

18세기 곧 영정조시대에 대한 강조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규정한 것처럼 조선의 문화가 침체일로에 있던 것이 아니라 조선 초기 세종시대와 같은 번성을 해왔다는 사관 곧 이 시기가 조선 왕조의 부흥기로서 근대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한 ‘정체성론’을 부정하고 우리 역사를 역동적인 모습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18세기 조선의 문예상황을 실학의 시대 또는 진경시대라 규정하고 우리의 산천을 그리는 진경산수화를 당시 화단의 주류로 여기고 싶어 했고, 활기찬 서민 생활의 모습이 풍속화로 반영된 것으로 보려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 후기의 사회와 문화가 근대적 전환 또는 발전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 당시의 대표적인 화가들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는 것을 넘어 일종의 신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화인 신윤복

4- 월하정인 (月下情人)
5- 주유청강 (舟遊淸江)

신윤복은 조선시대 화가들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의 활동 전반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인데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가 인간의 정념(情念)의 표현을 극도로 자제하도록 했던 성리학적 세계이자 문학이나 예술을 인간의 심성을 교화하는 계몽적 성격으로 파악하는 재도론적(載道論的)인 사회이기 때문에 특히 이에 반한다고 생각되는 기록을 극도로 억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형이상학적이거나 고상하지 못한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 했기 때문에 신윤복과 같이 기녀나 왈자패 따위를 그리는 인물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기 힘들었다고 여겨진다.

많지 않은 자료를 통해 재구성해 보면 신윤복의 가계는 조선 후기의 화원가문의 하나인 고령 신씨 가문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화원으로 도화서에 오래 근무한 신한평(1735-1809이후)으로서 여러 대에 걸쳐 화원이 배출하였다.

신윤복의 생졸년은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신한평의 활동 연대로 미루어 대략 1750-1760년대에 출생하여 1813년 이후까지 생존한 것으로 보이며 부인이나 자녀 등에 대해서도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제작된 의궤나 규장각 자비대령 화원 녹취재 등 여러 국가기록에서 그의 활동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면 신윤복이 과연 국가의 그림제작 기관인 도화서에 실제로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 사실이다.

신한평이 70세를 전후한 시기까지도 도화서 화원으로 근무한 것으로 볼 때 부자가 함께 화원으로 일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는지조차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신윤복은 여색(女色)을 탐하고 색정(色情)을 암시하는 춘정류(春情類) 풍속도를 많이 그린 풍속화가로만 인식되고 있으나 산수화 및 동물을 그리는 영모화도 잘 그렸으며 운치있는 화제(畵題)도 자신이 직접 짓고 쓰는 등 문기있는 인물이었다.

어쨌든 신윤복이야말로 조선여인의 미를 가장 아름답게 조형화한 인물이자 이후 제작되는 풍속화 및 성풍속도의 양상과 전개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뛰어난 사실적 묘사력과 예술적 격조를 갖춘 완숙한 필치로 창조해낸 신윤복의 미인도와 풍속도야말로 조선 후기 회화의 높은 성취를 반영한 것이자 당시 생활상의 핍진한 반영이라는 점에서 생활사적 관점에서도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신윤복의 그림이 1800년을 전후한 시기 기방(妓房)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조선 후기 서울의 유흥문화의 회화적·조형적 반영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만 19세기에 접어들면 회화가 극도의 정신성을 강조한 추사 김정희의 영향 등에 의해 회화풍조가 변화되어 인물화나 풍속화 등에 대한 수요나 비중이 줄어들어 그 품격과 수준이 점차 쇠락하는 등 아쉬움이 있다.

■ 신화와 허상을 넘어

신윤복이 춘화를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내용은 근대의 사학자이자 언론인인 문일평의 언급에서 비롯된 것일 뿐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이러한 사유로 국가의 그림제작 기관에서 쫓겨난, 조선 후기에 해당되는 일본 에도시대 화가의 에피소드가 와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윤복이 남자인가 여자인가라는 논의나 김홍도와 신윤복이 함께 임금 앞에서 그림 시험을 본다는 등의 설정 등은 와전의 수준을 넘은 흥미를 돋우기 위한 만화적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의 가능성은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빈약함을 의미한다.

전통시대와 문화에 대한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인 이해수준을 넘는 최소한의 이해가 바탕에 깔린 후 자유로운 소설적 발상에서 창조된 판타지와 같은 세계가 펼쳐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바람을 갖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김상엽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greymac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