僧은 僧이요 俗은 俗이다… 조동종은 묵조선(默照禪)의 본류중창조 매월당 입적 515주기 맞아 '납자필람' 펴내혜초의 '절은 있으돼 스님이 없다' 경구에 소중한 귀감 담겨참회·정진 통해 속세의 업 녹이고 불자의 참다운 삶 살아야

불기 2552년 부처님 오신날, 전국의 사찰은 오색등으로 치장했고 신도들은 저마다의 불심으로 부처님의 자비를 담고자 했다. 그렇게 부처님 오신날은 화려하게, 그리고 중생들의 열기를 확인하며 지나갔다. 그렇다면 온누리에 가득했던 불심과 자비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정화된 마음 한구석에 오롯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연례행사처럼 되풀이 되는 속세의 요란함에 묻혀 한갓 미몽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승(僧)과 속(俗)이 구분되지 않고 승이 속처럼, 속이 승처럼 가심(假心)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승이 승답지 못한 경우 속은 속으로 남을 뿐이다.

어쩌면 부처님이 매년 이 땅을 찾는 것도 승이 승답게, 승이 속을 정화시키라는 가르침(자비)을 베풀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불교계의 그 많은 종파와 승이 제각각 숭고함과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승(僧)은 승(僧)이고, 속(俗)은 속(俗)'이라는 평범하면서도 지극히 엄중한 진리를 담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 선풍(禪風)을 타고 전해진다. 대한불교 조동종(曺洞宗) 승정원장 달제 지운 선사의 묵언 수행과 그에서 비롯된 <납자필람(衲子必覽)>이라는 교서(敎書)다.

달제 지운 선사는 출가 후 오직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경'주력 기도를 해왔다. 명산과 수승한 기도처를 찾아다니며 한시도 주력을 놓지 않는 정진으로 기도의 힘이 대지를 덮고 하늘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회와 주력을 통해 속세의 업장(業障)을 녹이며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사는 것이 참다운 불자의 생활임을 강조한다. 종단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조동선의 근간을 깊이 연구하여 종지(宗旨)를 세우고 수행자의 길을 바로 가기 위해 부처님 이래 한국불교에 면면히 흐르는 법맥을 정리해 <납자필람>을 펴냈다. 이 책에는 한국과 관계된 중국과 일본 승려도 포함된 1, 483명의 승려 행적이 정리돼 있다. ,

"우리 불교를 논하면서 중국 불교를 필요 이상으로 앞세우는 것이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1,200년 이상 이 땅에 불교의 뿌리를 내린 선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갔으며 불국토와 불교대중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숭고한 땀을 흘렸는 지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일반 대중보다 불심을 전하는 스님들을 향해 쓴 책이지요."

책명을 '납자필람', 즉 납의를 입은 사람(중을 이르는 말)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뜻으로 지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 혜초의 '절은 있으돼 스님이 없다' 경구에 소중한 귀감 담겨
참회·정진 통해 속세의 업 녹이고 불자의 참다운 삶 살아야

"신라말 혜초 스님이 쓰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보면 책의 핵심이기도 한데 '절은 있으돼 스님이 없어 만날 사람이 없다'는 구절이 있어요. 그만큼 혜초 스님을 비롯해 당대 우리나라 스님들의 학식은 중국 승들을 뛰어넘어 바로 인도에 가서 법경을 구할 정도였지요. 책에 수록된 승려들 역시 불법을 구하는데 부단한 노력을 했어요. 요즘을 사는 승이나 신도들에게 귀감이 되는 내용이지요."

달제 지운 선사는 국내에 불교 종파가 다양하고 승들도 많지만 우리 불교의 선인들처럼 불심을 얻기 위한 노력과 학식을 쌓기 위해 정진하는데 소홀한 측면이 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또한 우리 불교 역사를 보면 신라말에서 고려 초, 고려말과 조선초 등 혼란기에 불교의 본질을 흐리고 불심을 오염시키는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 현대사의 법란(法亂)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달제 지운 선사는 조계종을 비롯한 선종(禪宗)의 맥을 이루는 조동종(曺洞宗)의 승정원장이다.

조동종은 중국 동산양개(洞山良价)에 의해 개창되어 신라의 금장화상(金藏和尙)이 전법계(傳法戒)를 받아왔고 양개의 제자인 운거도응(雲居道膺)과 광인(匡人)에게 계(戒)를 받은 이엄(利嚴), 경보선사(慶甫禪師) 등에 의해 조동종의 법맥(法脈)이 이땅에 뿌리내린 지 1,200여년이 된다.

조동선법(曺洞禪法)의 핵심사상인 조동오위(曺洞五位)는 본체인 정체(正ㆍ體)와 현상인 편용(偏ㆍ用)이 둘이 아니라는 회호불이(回互不二)를 주장한다. 본체와 현상은 둘이 아니어서 본체 그대로가 현상임을 강조한다.

조동종은 수행방편에서 조계종과 차이를 보인다. 조동종의 선법이 묵조선(默照禪)이라면 조계종은 그와 대비되는 간화선(看話禪)이다.

묵조선은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을 기본으로 한 수행법으로, 갑자기 대오(大悟)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절대로 의뢰하는 선이다. 이에 반해 간화선은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화두(話頭)ㆍ공안(公案)을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이다.

학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조동종은 고려시대의 일연(一然), 조선초 매월당 김시습(법명 설잠), 조선말 만해 한용운으로 맥이 면면이 이어져 왔다고 한다.

특히 조동종의 중창조(重創祖)인 매월당은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다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변보를 듣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고 하였다. 매월당은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자 절의(節義)의 표상으로 숭앙받고 있다.

매월당이 입적(1703년)한지 515년이 된 올해 사단법인 매월당문학사상연구회는 단제 지운 선사의 <납자필람> 출간을 적극 지원, 조동종의 법맥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단제 지운 선사는 '불교가 무엇이냐'는 속인의 우문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에 대해선 "바르게 알고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깨달아도 부단히 노력하지 못하면 까달음을 잃고,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행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선사는 <납자필람>의 '참동계(參同契)' 선시(禪詩) 말미를 '千載比事復誰收'(천재비사복수수)구절로 맺었다. '천년이 지나도 이 일을 누가 다시 맡아 할거나'라는 의미로 스스로 <납자필람>을 펴낸 결의와 앞으로 조동종의 법맥을 잇기 위한 경주를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달제 지운 선사의 불심으로 우리 모든 승속(僧俗)의 마음에 선풍(禪風)이 일어나기를 기원해본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