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중앙개발서 디자인 전담팀 만들어 주식회사로 성장삼성서 독립 후 더욱 정진

타워팰리스, 에버랜드, 서울시립미술관, 강원랜드 카지노호텔, 캐리비안베이, 인천공항 면세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중앙디자인이 내부 설계 및 시공을 했다는 점이다.

중앙디자인은 한국의 디자인을 선도하는 회사다. 뿐만 아니다. 한국의 건축디자인을 해외에 소개하면서 수출도 하고 있다. 중국 상하이 푸둥의 58층짜리 중국은행과 베트남 호치민의 다이아몬드 플라자 프로젝트 등을 수주한 바 있다. 일본 세라믹협회에서 주최한 국제공모전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제 한국은 디자인 분야의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그 중심에 중앙디자인이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할 사람은 이 회사 변인근(58) 회장이다.

필자는 인터뷰 장소로 가급적이면 호텔 커피숍 같은 곳보다는 인터뷰 대상의 집무실을 선호한다. 그의 사무실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가치를 두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언론이 보도한 기사를 사무실에 잔뜩 붙여놓은 사람은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또한 높은 사람들과 찍은 사진을 여기저기 붙여놓은 사람은 권력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다. 책으로 도배한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변 회장의 사무실은 정갈했다. 책이 많았는데, 특히 글귀가 담긴 액자 두 개가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사해일가’(四海一家)라는 내용이었다. 서예가인 친구가 준 것이란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라는 기원으로 써 주었단다.

친구의 바람대로 변 회장은 건축과 인테리어 분야에서 초절정 고수가 됐다. 또 하나는 당나라 시절의 시구인 ‘시우’(時雨)였다. 글자 자체는 시기 적절하게 내리는 비라는 뜻이다. 그에게 의미를 물어보자 이렇게 답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립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의 성장과정은 평범했다. 아버지는 충남 보령에서 면장을 했었다. 그는 3남2녀 가운데 장남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중학교 때까지는 농사일과 밭일을 많이 해서 지금도 그런 일에는 익숙하단다.

고려대 건축과 시절에는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많이 마시고 다녔다고 고백한다. 그는 대학졸업 후 건축설계사무소를 잠시 다닌 뒤 화재보험협회에서 건축관련 업무를 맡아 몇 년 동안 일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있다. 변 회장에게는 삼성 비서실 근무가 전환점이 됐다. 그는 화재보험협회에서 근무한 지 4년쯤 되던 어느날 삼성 비서실의 연락을 받고 인력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그는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우선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같은 거목의 일하는 방법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선대 회장은 보통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의 말씀을 필기할 때는 손이 다 떨리더군요. 뭔가를 지시하고 일을 추진할 때는 보는 눈이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늘 우리 생각과는 다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당시에는 불평도 하고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경험이 제 사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디자인 분야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도 삼성 비서실에 근무할 때였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디자인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지시 때문에 이건희 회장 집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디자인 관련 잡지와 책이 엄청 많은 겁니다. 그 분은 미래를 읽는 힘이 있잖아요. 그때 확 느낌이 왔습니다. 앞으로는 디자인 분야가 중요해지고 각광받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요. 게다가 제가 건축과를 나왔기 때문에 더더욱 저와 맞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순간적이지만 큰 깨달음을 얻었지요.”

성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헌신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부산물과 같다. 변 회장 역시 그랬다.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그의 실력은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어떻게 하면 디자인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게 일이었다.

그런 고심 끝에 삼성 계열사인 중앙개발(현 에버랜드)에 근무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디자인에 대한 꿈을 제대로 펼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앙개발은 빌딩과 부동산을 관리하는 회사로, 삼성에서는 인기가 없는 곳이었다. 그가 중앙개발로 옮긴 뒤 처음 한 일은 디자인 전담팀 구성이었다.

“사람들을 설득해 디자인 전담팀을 만들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를 포함한 세 명의 팀원은 첫해 3억 원 매출 목표를 부여받았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그래도 부딪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상밖에 첫해 14억 원이라는 매출을 달성해 주목을 받게 됐지요.”

대다수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변 회장 역시 늘 자신이 주인이란 생각으로 일을 했다. “저는 한번도 월급쟁이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모든 사업은 제 사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터프한’ 삼성 비서실 근무도 해낸 것이지요. 또 신생팀을 꾸려 그렇게 많은 일을 한 것도 내 사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가능했다고 봐요.” 이런 열정의 결실로 1991년 일개 부서였던 팀이 중앙디자인이라는 주식회사로 거듭났다.

그에게 가장 큰 위기이자 기회는 IMF 외환위기였다. “저희 회사는 삼성 계열사였지만 외환위기 덕분에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구조조정 차원에서 불요불급한 사업은 정리를 했거든요. 하지만 10여년간 열심히 키운 인재들을 다수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여명을 68명으로 줄였지요. 그런데도 삼성이라는 울타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매출을 두 배로 올려야 살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우리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어서 참 힘들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그 덕분에 자생력이 생겼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 일이라는 게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는 법인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인간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브랜드로 ‘인앤인’(人&人)을 택한 것도 그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다. 그 때문인지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일이 바로 인재 육성이다.

“법인으로 전환하면서부터 국내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의 역사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재 육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저는 직원들이 해외출장을 가면 가장 좋은 호텔에서 1박을 하도록 하고, 가장 좋은 식당에서 식사도 하게 합니다. 멋진 경험을 해야만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있거든요. 1994년부터 ‘JAD(중앙디자인)공모전’을 실시한 것도 인재육성 때문입니다. 여기서 상을 받은 인물들이 현재 중앙디자인의 핵심인재로 활동하고 있지요.”

그는 어릴 때부터 “사장이 될 거야”라고 굳은 다짐을 했다. “내가 성공하면 돼지가 아닌 소를 잡아 대접하겠다”라고 친구들에게 큰소리도 쳤단다. 당시 친구들에게는 허무맹랑하게 들렸겠지만 결국 그는 꿈을 이루었다. 그런 것을 보면 성공의 원동력은 자신에 대한 강한 자신감인 것 같다. ‘디자인 강국’이라는 변 회장의 꿈이 꼭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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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