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캐스터의 세계

TV 볼륨을 줄여 놓고 야구 경기를 본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도 소금 없이 삶은 감자를 먹는 밋밋한 느낌일 것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스포츠 전문 캐스터는 소금과도 같은 존재다. 긴박한 순간을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덕아웃 뒤편에서 일어나는 뒷얘기를 소개하고, 원재료에 맛깔스러운 양념을 집어넣는게 캐스터들의 몫이다.

현재 스포츠 전문 케이블 TV에서 활동 중인 캐스터들은 대략 50명 안팎. 이 가운데 야구 전문 캐스터는 유수호(61) KBS N 위원을 비롯해 한명재(36) MBC ESPN 캐스터, 임용수(40) 프리랜서 캐스터, 정지원(41) Xports 캐스터등15, 16명정도다.

원조 유수호

국내 스포츠 캐스터 1호로 통하는 유수호 위원은 39년째 마이크를 잡고 있다. 69년 아나운서로 동양방송(TBC)에 입사한 그는 이듬해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라디오 중계를 맡으면서 스포츠와 인연을 맺었다.

80년 방송 통폐합 때 KBS로 자리를 옮긴 유 위원은 2005년 9월 KBS에서 정년 퇴직한 뒤 같은 해 10월부터 KBS N에서 일하고 있다. 유 위원은‘전천후’다.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선 17개 종목 중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굳이 주 종목을 꼽으라면 야구와 배구다.

양대 산맥 한명재·임용수

유수호 위원 정지원 캐스터 정우영 캐스터 (왼쪽부터)
유수호 위원 / 정지원 캐스터 / 정우영 캐스터 (왼쪽부터)

젊은 야구 캐스터들 중에 한명재 캐스터와 임용수 캐스터가‘투톱’으로 꼽힌다. 둘은 97년 스포츠TV 2기 아나운서들이다. 한 캐스터와 임 캐스터의 동기로는 김성주 전 MBC 아나운서가 있다.

한캐스터와 임캐스터는 노력파로 정평이 나 있다. 두 사람은 방송이 없는 날에도 하루 평균 3, 4시간씩 야구 공부를 한다. 신문기사 스크린은 기본이고 각종 자료를 찾아 꼼꼼히 정리한다. 한 캐스터는 프린트 자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메모를 한다.

미쳐야 산다

“캐스터는 경기에 몸을 던져 흐름을 스스로 만들 줄 알아야 해요. 1회부터 끝날 때까지 집중하면서 보는 시청자는 흔치 않아요. 다른 일을 하다가도 한 순간에 TV나 라디오로 주의를 돌리게끔 강약 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거죠.” 유수호 위원은 “생각보다 외롭고 힘든 길이다. 결론은 자신이 맡은 종목을 미친 듯이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캐스터는 “화려함만 보고 스포츠 캐스터가 되려 한다면 오산이다. 스포츠에 대한 열정은 기본이고 사생활을 포기해야 할 정도”라면서 “스포츠캐스터 지망생이라면 기본적으로 방송을 많이 보고 스포츠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된장찌개 같은 방송

스포츠 전문 캐스터들은 된장찌개 같은 방송이 롱런의 비결이라고 입을 모은다. 스테이크는 한두 번은 맛있지만 오래 먹을 수 없는 반면 된장찌개는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다는 것이다.

유위원은 “해설자들에게만 의존하는 방송은 한계가 있다. 캐스터가 스스로 상황을 풀어나가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한 캐스터도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송을 하는 게 중요하다. 공부를 게을리하는 순간 시청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고 강조했다.

■ 아찔했던 '실수의 추억'

생방송이 ‘운명’인 스포츠 캐스터들은 누구나 하나쯤 실수의 추억을 갖고 있다. 39년차 베테랑인 유수호 KBS N 캐스터는 “얼마 전까지도 부끄러워 얘길 못 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30년 전 기억을 끄집어냈다. “77년인가 78년 고교야구 결승전 중계 때 죽다가 살아난 적이 있어요”

유 캐스터는 당시 결승전이 열리기 전날 밤 동대문구장 근처에서 동료와 술을 마시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귀가했다. 일이 터진 건 다음날 아침. 중계는 코앞인데 머리가 깨질 듯하고 속이 뒤틀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요일이라 약국도 죄다 문을 닫아 하는 수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동대문으로 향했다. 유 캐스터는 결국 중계 내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겨우겨우 임무를 완수했다.

중계 마지막에 해설자나 본인의 이름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려 당황한 적도 많았다고. 유 캐스터는 요즘엔 잘 보이는 곳에 해설자와 자신의 이름을 큼지막하게 적어 두고 중계를 시작한다.

젠틀한 이미지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한명재 MBC ESPN 캐스터도 농구 중계를 했던 2005년 아찔한 경험을 했다. 토요일 전주에서 열리는 플레이오프 중계가 예정돼 있었는데, 날짜를 착각한 해설원이 끝내 체육관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경기 전까지‘대타’를 수배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결국 한 캐스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원맨쇼를 해야 했다. 한 캐스터는“혼자 하려다 보니 한계가 있어 음량을 높여서 방송을 했다. 그런데 경기 후 일부 팬들은 ‘혼자 하는 것도 색다르다’고 말해 한동안 헷갈렸다”고 털어놓았다.


최경호 기자 squeeze@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