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올림픽사를 빛낸 위대한 올림피언 송순천·김성집 그리고 양정모

“당신은 올림피언인가?”자크로게 IOC 위원장이 세계 각국의 체육계 인사들을 만날 때 입버릇처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어떻게 물었을까. 아마도“당신은 금메달리스트인가?”였을 게다. 우리나라는 올림픽에서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고도 눈물을 내비치는 거의 유일한 민족이다.

하지만 자크로게의 질문법이 옳다. 올림픽의 정신 때문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헌장의 첫머리는 “인종과 종교, 정치의 신념으로부터 어떤 차별도 없는 스포츠로 세계의 젊은이들을 일깨워 세계의 평화와 화합에 기여한다.”이다.

금메달인가 은메달인가 혹은 동메달인가는 올림픽의 정신에 비춰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국가를 대표해 세계각국의 선수와 자웅을 겨루는 게 올림픽 경기다. 최선을 다해 깨끗한 경기를 펼쳤다면 은메달이건 동메달이건 혹은 패자였건 간에 그는 성공한 선수다. 대부분의 올림픽 특집 역시 국민의 관심을 따라 금메달리스트를 다룬다. 하지만 우리 올림픽 사(史)에는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 동메달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그 어떤 금메달리스트보다 올림픽 정신에 충실했으며 한국이 국제 스포츠외교 무대에서 자랑거리로 내세울만한 진짜배기 올림피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최초의 금메달리스트 역시 빼놓을 수 없다.

■ 편파판정으로 금메달 뺏기고도 감사한 올림피언, 송순천

송순천은 1956년 겨울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복싱 벤텀급 결승전에서 동독의 볼프강 베렌트와 맞붙는다. 그가 이기면 아시아 최초의 유색인종 금메달리스트가 되고 베렌트가 이기면 동서독이 함께 출전한 마지막 올림픽에서 최초의 금메달리스트가 나오는 ‘빅 매치’였다.

송순천은 3회전 내내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다. 누구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국기게양대에서도 태극기를 맨 윗자리로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동독선수 베렌트의 판정승이었다. 당시 심판진 네 명 중 세 명이 공산권 국가 출신이었다.

관객들은 야유를 보내고 심지어 의자를 링으로 내던지기까지 했지만 결과를 뒤집지는 못했다. 개선한 송 선수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승리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우리 국민의 이름으로 금메달을 주겠다”며 준비한 순금메달을 손에 쥐어줬다. 한국이 최빈국이 아니었다면 송 선수가 금메달을 뺏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이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동독의 스포츠 영웅이 된 베렌트는 7년뒤 대한올림픽위원회(KOC)를 통해 송 선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날의 경기는 너의 승리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전에도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송순천은“좀 억울했지만 교훈을 얻었다. 하느님은 내게 겸손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고 말한다. 송순천과 베렌트 모두가 위대한 올림피언으로 평가 받는 이유다.

■ 전쟁통에 첫 올림픽 메달 선사한 김성집

1984년 런던올림픽 김성집(맨 오른쪽) 선수 동메달 수상 장면

동메달리스트 김성집. 하지만 그의 동은 어떤 이의 금보다도 값지다. 그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딴 시점은 1948년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다. 런던올림픽 역도 미들급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382.5kg을 번쩍 들어올리며 그는 이제 막 건국한 한국의 위상 역시 들어올렸다. 그는 4년 뒤 헬싱키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동메달을 얻는다.

김성집이 런던을 향해 떠난 때는 건국 이전이었고 한국전쟁의 와중이었다. 런던으로 떠난 김성집은 여권도 없이 신분을 보장하는 타이핑 문서를 들고 출국했다. 그는 런던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맞았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은 애초에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유니폼 역시 변변치 않았다. 국제 경기규칙을 잘 몰라 다른 국가 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고 시합에 출전했을 정도다.

최악의 조건에서 그가 따낸 동메달은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송민석 대한 올림피언 협회 사무국장은 “동메달이지만 최악의 조건에서 보여준 김성집의 올림픽 정신은 우리나라가 이후 88올림픽을 유치하는 자산이 됐다”고 말한다. 제대로 된 한 사람의 올림피언이 IOC를 비롯한 국제스포츠외교 무대에서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자본과 로비가 다는 아니다.

■ 목마른 한국에 금메달을, 양정모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양정모 선수(가운데)의 금메달 수상 장면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빼놓고 갈 순 없다. 주인공은 레슬러 양정모다. 양정모는 1976년 8월 1일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폐막 하루 전날, 레슬링 자유형 웰터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검어쥐었다. 1936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고도 일장기를 휘날려야 했던 설움을 씻은 쾌거였다. 40년만이었다.

양정모의 금메달은 그야말로 ‘가뭄 끝에 단비’였다. 우리나라는 스포츠강대국과 정치대국에 밀려 금메달을 얻지 못했었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는 단 한 개의 메달도 따지 못했다. 특히 4.19혁명 이후 올림픽 참가 성적이 좋지 못했다.

그의 메달은 정부의 체육 지원이 낸 성과였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한국은 재일교포 선수였던 오승립이 유도에서 은메달은 땄다. 이에 반해, 북한은 이호준의 사격금메달을 비롯한 금,은,동메달을 획득했다.

냉전구도에서 자존심이 상한 박정희 대통령은 체육계 지원을 결심하고 66년 건립돼있던 태능선수촌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엘리트 스포츠 육성을 시작한다. 특히 메달 획득 가능성이 높았던 레슬링, 복싱, 유도 등 격투기 종목 키우기에 집중했다.

양정모의 코치였던 정동구 한국체육대학교 명예교수는 “당시에는 패자부활전이 있어 예선에서 오이도프에 지고도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며 최초의 금메달일 뿐 아니라 불굴의 스포츠정신을 보여준 메달로 의미가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