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 40여 년 외길 '신의 눈' 감정가국내 유명 고서화 절반이상 그의 손 거쳐"고미술에 대한관심·애정·높은 안목이 좋은 컬렉터 기본 조건"

“와 이리 젊노?”. 70년대 초, 삼성그룹 창업주인 故 이병철 회장은 27세의 공창호를 보고 의아해했다. 지인을 통해 국내 최고의 고서화 감정인을 소개받기로 해 나이 70쯤 되는 노인이 올줄 알았는데 고작 20대의 청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고미술품이 진열된 회의실로 청년 공창호를 데려가 작품에 대해 물었다. 그의 능력을 테스트해보기 위해서였다. 공창호는 미술품 하나하나에 누구의 것이며 진짜인 이유, 가짜면 왜 가짜인지를 여러 근거를 제시해 설명했다. 가령 비슷한 작품에 이름만 새겨놓은 것은 가짜이고 오히려 낙관을 빼면 진짜가 되며, 한말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부러 만든 것도 있다는 등등. 공창호의 능력을 인정한 이 회장은 그 후 작품을 수집하는데 전적으로 그에게 의뢰했다.

공창호(61) 공화랑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고미술품 감정가다. 공 대표는 10대 후반부터 고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20대 초반 표구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문가의 안목을 키웠다. 그리고 40여년을 고미술의 외길을 걸어 왔다. .

“제 아버님 친구분이 표구사를 하셨는데 그 분이 저 보고 미술에 소질이 있다며 한번 배워보라고 하셨어요. 얼마간 표구 일을 배우다 직접 표구사를 차렸죠.”

공 대표는 1970년대 인사동에 공표구사를 열었다. 표구를 하면서 고미술품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됐고 이런저런 실험을 하면서 자연스레 수많은 종이와 안료의 특질 등을 깨우쳤다.

우연한 행운도 적잖았다. “당시엔 30점 내지 50점의 작품을 가지고 와서 일부는 표구를 하고 나머지는 표구값으로 가지라고 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그것으로 여러 실험을 하면서 지질과 안료에 대한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됐죠. 또 옛날에는 재료가 귀하기 때문에 병풍의 작품을 겹겹으로 몇 년마다 더러워지면 계속 붙였는데 그런 병풍에서 귀한 작품을 얻는 경우도 있었죠.”

병풍의 겉 작품을 들어내다 보면 그 안에서 추사 김정희의 글씨, 오원 장승업, 단원 김홍도, 긍제 김득신, 현재 심사정 등 당대를 대표하는 그림들이 여럿 나오기도 했다는 것.

공 대표는 고미술을 더 알기 위해 스스로 스승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임창순 선생께 한학과 서예를 배웠고 검여 유희강 선생님, 일중 김충현 선생님한테서 서예를 배웠어요. 또 어떤 방면에 유명하다는 분이 있으면 전국 어디라도 찾아가 배웠습니다.”

그렇게 40여년을 고미술에 전력해 온 결과 공 대표는 이 방면에서 ‘신의 눈’을 가졌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국내에서 거래되는 유명 고서화 중 그의 손을 거쳐간 게 절반 이상이 된다. 또한 수많은 고미술품이 그에 의해 진위가 가려지고 문화재로 인정받기도 했다.

5공화국 시절 대형 금융사건으로 유명한 이른바 장영자 사건, 명성 김철호 회장 사건에서 정부는 이들의 고미술품 감정을 공 대표에게 의뢰했다. “두 사람은 고미술품이나 현대 미술품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정작 가치 있는 작품은 별로 없었어요. 장영자 씨의 경우 도자기가 좋은 작품이 몇 점 있었지만 김철호 회장은 이렇다 할만한 작품이 거의 없었어요.”

고미술에 대해 진위를 밝히는 일은 공 대표에게 고통을 수반하기도 했다. 견해가 다른 학계, 문화재 위원들과 소원해지고 가짜로 판명한 고미술품 소장자와 원수가 되는가 하면, 협박과 음해를 당하기도 했다. 한국일보에서 크게 다뤘던 ‘고산구곡도’ 병풍 가짜 논란, 국내 박물관장들까지 진품으로 인정한 고려불화를 추적해 가짜임을 밝혀 낸 것, 1980년대 대서특필된 미인도 밀반출사건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공 대표는 국내 고미술품 감정이 전문가를 자처하는 비전문가들에 의해 휘둘리는 현실이 안타깝고 위험하다고 말한다. “가짜를 진짜라고 하는 건 개인이 이익을 얻거나 손해를 보는 일이지만 진짜를 가짜라고 말하는 것은 문화재가 손실되는 일입니다. 차라리 모르겠다고 하면 좀 나은데 체면 때문에, 이해관계 때문에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공 대표는 일부 학계 인사나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실험 경험이 거의 없어 고미술의 실재적 측면을 잘 모르면서 이론만 갖고 진위를 논하는 것은 오판의 여지가 크다고 말한다.

“종이만 해도 수십가지가 넘고 시대에 따라 달라요. 붓, 먹, 안료, 낙관 등 종류 뿐만 아니라 알아야 할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죠. 이러한 것들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수많은 실험 경험을 통한 실무를 겸비해 총괄적으로 아는 전문가들이 드뭅니다“

공 대표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잇는 1000원권 신권 속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에 대한 이동천 박사의 위작 주장에 대해 “실물을 보지 않은 채 자료 분석만으로, 그리고 중국에서 고서화 감정을 배운 이론으로 한국 고서화의 진위를 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과연 그 분이 얼마나 많은 실험적 경험이 있는지, 그래서 종이에서부터 붓의 시용, 그밖에 겸재가 어떤 상황에서 그림을 그린 것인 지 등등 모든 것을 알고 그런(위작) 판단을 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중국화와 한국화는 같은 동양화이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문방사우를 쓰는 거며 그림의 구도, 내용 등에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중국의 감정이론으로 한국화의 진위를 논하는 것은 잣대부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또한 간송미술관, 호암미술관 작품 중 추사 작품의 절반 이상이 위작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학자로서 오만한 자세”라고 지적했다. “물론 추사 작품 중에 위작이 의심스런 작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위작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 ‘옥에 티’ 정도라고 봅니다. 지적(知的) 과시를 위해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실제처럼 말하는 것은 학자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 대표는 고미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한때 서양화를 압도했던 고미술품 거래가 최근들어 가격이 급락하고 경매시장에서 외면받게 된데 대해 유통 과정이 불투명한데다 소위 전문가들의 진위에 대한 견해가 각각 달라 고미술에 대한 신뢰를 떨어트린 게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2006년 초까지만 해도 국내 미술경매의 최고가 신기록은 고미술이 주도했다. 박수근 유화가 4억 원 정도였던 2001년 4월, 겸재 정선의 ‘노송영지도(老松靈芝圖)’가 7억 원에 낙찰됐다. 그러나 2006년 하반기부터 현대미술 낙찰가가 급등한 반면 고미술품 거래는 급감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박수근의 ‘빨래터’는 지난해 5월 경매에서 45억2,000만 원의 최고 낙찰가를 기록, 3원 3재(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식, 현재 심사정)의 그림 값을 합한 것보다 훨씬 높게 경매됐다.

공 대표가 올해 고미술 경매회사인 아이옥션의 서화 부분 감정을 맡은 것은 고서화 거래의 가장 큰 장애 요소인 작품의 불투명성을 제거하고 진위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으로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함이다. 그래야 고미술 경매가 활성화 되고 나아가 우리 고미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확산될 수 있다는 게 공 대표의 믿음이다.

그에게 한국 고미술품의 매력, 멋에 대해 물었다. “한국 고미술은 담백하고 시원하고 구수합니다. 중국, 일본과는 다른 독창성이 잇어요. 중국은 너무 복잡하고 일본은 너무 미세해요. 우리나라는 선 하나만 그려도 똑 같은 선이 없으면서도 똑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일본은 기계로 뽑은 것같고, 중국은 너무 복잡해 멋이 적어요. 우리나라 것은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공 대표는 고미술에 대한 좋은 컬렉터가 되기 위한 조건을 묻자 삼겅그룹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전 회장 부자를 예로 들었다. “두 분은 우리 고미술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그에 걸맞는 안목을 지니셨죠. 또 그 분들로 인해 우리의 소중한 고미술품이 외국으로 유출되지 않고 국내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고미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높은 안목이 좋은 컬렉터가 될 수 있는 기본 조건이라는 게 공 대표의 설명이다. 덧붙여 이병철ㆍ이건희 부자의 미술 취향에 대해 물으니 “호암 선생님은 오직 고미술에만 관심을 두셨는데 이건희 회장께선 고미술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고미술의 침체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공 대표의 향후 행보를 물었다. “연구소(대동문화재연구소)를 본격적으로 열어 고미술을 감상, 감정하는 법을 가르쳐 불모지와 같은 고미술 감정분야를 활성활 계획입니다.”

또한 학계와 딜러들의 교류를 촉진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일본만해도 학계와 현장 딜러들의 교류가 활발해 문화재를 지정할 경우 학계 인사나 문화재 전문가들이 현장 경험이 풍부한 딜러들의 협조를 받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양측이 서로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대승적 차원에서 교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편 공 대표는 미술을 통한 한일 문화교류에도 한몫 하고 있다. 매년 한국과 일본 젊은 작가들의 공동 전시를 자신의 공화랑에서 열고 있는 것. 올해로 9년째를 맞는 한일 전시회를 통해 유망한 작가들도 발굴돼 장차 양국에서 미술계의 중추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공 대표의 아들 상구씨는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미술대학원에서 도자기 분야를 전공하면서 아버지의 길을 걷고 있다. “내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게 기특하고 고맙죠. 또 소질도 보여 기대가 큽니다.”

공 대표의 둘째 딸은 베이징대학에서 중국역사를 공부하고 미술을 전공, 현재 베이징 공화랑을 운영하고 있다. 공 대표와 함께 한국과 중국의 미술 교류에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자 문화의 핵을 이루는 고미술은 그 가치의 중요함에도 시류에 밀려 외면받고 위기에 몰려 있다. 공창호 대표와 같은 고미술 전문가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요구되는 상황이다. 우리 고미술시장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증인인 공창호 대표가 40여년을 머문 인사동과 공화랑이 여러 난제를 극복하고 고미술의; 메카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