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외국어 자막화 등 진행… 공연 예술 박물관 설립도

‘여성스럽다’와 ‘여장부’는 현실적으로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 있다. 신선희 국립극장 극장장. 여성스러우면서도 저돌적인 추진력을 함께 지닌 수장이다. 취임 3년째. 그러나 여전히 그의 아이디어는 바닥없는 샘처럼 솟아넘친다.

언젠가 누군가는 해야 하며, 하기로 약속했고, 하고 있으며, 하고 싶었던 일들을 연타로 성사시키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만 해도 그가 일궈낸 국가적 대사(大事)의 일편이다. 며칠 남지않은 올해 2회째 행사개막을 앞두고 그는 온 신경이 그곳에 몰려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따로 물을 것도 없이 시작된 얘기도 그것이었다.

“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네 줄기 강물이 바다로 흐르네’는 너무나 아름다운 작품이예요. 한국종교의 근간이 된 4가지를 바탕 주제로 삼아 만든건데, 우리 한국악기로 현대음악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황병기 선생님, 박범훈 선생님 등을 찾아가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만든 작품이예요. 최고의 추상음악을 만들어서 세계에 들고나가자고 했더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고 하시더라고요. 황병기 선생님이 쾌히 승낙해주셔서 작품이 시작됐죠. 작년에 공연을 했는데 한두번만 보고마는게 너무 아까와서 올해는 더 업그레이드해서 다시 무대에 올려요.”

신 극장장의 특기는 탁월하고 남다른 해외교류 능력에 있다. ‘네 줄기 강물이 바다로 흐르네’는 지난해 벨기에 정부가 주최하는 한국페스티벌의 개막공연과 핀란드 헬싱키 특별공연에 초청됐다. 국립무용단의 ‘춤, 춘향’ 역시 지난해 <한ㆍ태국 수교 50주년 기념공연> 초청작으로 태국땅을 밟았다.

이어 <북경 춤 축제>에도 초대받았다. 국립창극단의 ‘청’은 2009년 노르웨이와 미국 워싱턴의 공연이 이미 예약된 상태. ‘테러리스트 햄릿’도 독일 순회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국립극장의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 중 국내 참가작 상당부분이 사실상 외국 나들이용 한국대표상품이다.

“ 그냥 우리가 돈까지 다 대줘가며 외국 공연단을 불러서 공연하는 건, 저는 국가적으로도 자존심 상해서 하기 싫어요. 당당하게 쌍방향으로 주고 받아야지요. 이번에 올릴 국립창극단의 ‘청’도 노르웨이의 공연 ‘페르귄트’를 받아오는 대신에 이쪽 역시 그리 가서 공연해주기로 한 작품이예요. 우리의 좋은 작품들을 해외로 더 많이 내보내고 널리 알리는데에 가장 애쓰려고 합니다. 비용도 오는 쪽(외국의 초청국)에서 자기들이 알아서 다 해결하도록 하고 있어요. 자국 대사관에서 마련하든, 그 나라 기업에서 후원을 받든 알아서 하시라고요. 그래서 작년에 단 3억5천만원밖에 안 들었어요. 그 많은 나라 작품들을 초청하면서도.”

“ 협상력, 맞교환 실력이 탁월하신데, 비결이 뭘까요?”

“ 운도 좋았고, 자막 작업 등으로 우리 작품의 우수성을 외국인들에게 확실히 인식시킨데서 나온 자부심도 있을거예요. 제가 여기(국립극장) 오자마자 시작한 작업 중 하나가 자막 작업이었어요. 거의 모든 작품을 다 외국어로 자막화했어요. 바로 효과가 나타나더군요. 외국인들, 특히 외교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관심을 보이며 다들 좋아했어요. 고맙다고도 하고. 주한외국대사들이 같은 작품을 두세번씩 보러 오기도 했어요. 특히 창극 ‘청’과 연극 ‘태’의 반응이 대단했어요. 그러면서부터 우리도 당당하게 선택권을 갖게 된거죠. 그래야 하고요.”

■ 신선희의 자존심, 한국의 자존심


그에게는 ‘국내 최초’ 타이틀이 몇 개나 따라 다닌다. 국내 최초의 여성 국립극장장, 연극전공자 출신의 최초 무대예술가 등이다.

“ 그 보수적인 프랑스도 3백년만에 첫 여성 극장장이 탄생했어요. 그 극장장이 제게 편지를 보내왔더라고요. 너무 보고 싶다, 초청할테니 와달라고요. 그래서 클래식한 작품을 보내달라길래 그 대신 우리가 받기로 한 게 오데옹 극장의 ‘소녀, 악마 그리고 풍차’ 등이죠. 이번 페스티벌때 초청되는 작품이예요.”

대외적인 타이틀 뿐 아니라 자신이 해 온 작업들 중에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거나 앞으로 붙을 일들이 줄지어 있다. 지난 4월에 개관한 KB청소년하늘극장 건립도 그가 성사시킨 국내 최초의 산물로 화제를 모았다. 국립극장으로서는 처음으로 기업과 손잡고 극장건물을 건립한 것. 이 첫 청소년전용극장이 개관하면서 청소년들을 위한 갖가지 예술제가 열리는 등 서서히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 그때도 국민은행을 찾아가 “제가 아이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고 말을 꺼냈어요. 결국 국민은행측에서 흔쾌히 저의 말에 동의해주셔서 32억5,000만원의 지원을 받아 이 극장을 지을 수 있었죠.”

그의 이 남다른 설득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 아마 솔직함때문일거예요. (실제로 그는 극장장이라는 직위가 주는 권위감을 전혀 느낄 수 없을만큼 매우 다정다감하고 감성 풍부한 대화법을 갖고 있다.) 저는 카리스마도 있지만, 여성스러운 면도 많아요. 힘들면 남자들에게도 잘 기대요.(웃음) 하지만 사람을 이용하는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거죠. 정직하게 말하면 오히려 더 잘 도와주시더라고요.”

극장 디자인도 직접 했다. 이 KB청소년하늘극장이 태어나면서 ‘안숙선과 떠나는 민요여행’도 시작, 전국의 약 1만2천여 명 청소년들에게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해주었다. 그래봐야 이제 신 극장장이 벌일 청소년문화운동의 예고편에 불과하다.

차후작으로 ‘공연예술박물관’ 건립도 대기중이다. 원래 맨먼저 하려했던 사업이었으나 현실적인 사정으로 순위가 다소 밀린 것. 애초에 취임시 그가 최종발탁된 결정적인 이유도 이 공연예술박물관 건립 계획이 담긴 제안서 내용이 탁월해서였다는 후담은 공공연하다.

■ 한다면 한다. '대충'은 어림없다.


그는 태생적으로 예술가적 기질을 물려받았다. 집안 분위기부터 그러했고, 어린 시절부터 30대 중반때까지 모던댄스부터 국악까지 배우는 등 내내 예술 곁에 있었다.

공연 분야에서의 이력은 특히 돌출적이고 광범위하다. 관련 분야 중 안 거친 것이 거의 없다. 연출, 극작, 무대미술까지 모두 섭렵한, 천상 예술인. 1971년 하와이대 연극과 대학원을 졸업, 1977년에는 뉴욕 폴라코프 무대미술학교 무대디자인과를 졸업했다. 1980년에는 동 학교에서 작화과를 졸업, 귀국 후 2002년 중앙대 대학원에서 동양연극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국내 연극계를 휩쓸고 다니던 와중이었다.

직접 창작하거나 참여한 작품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970,80년대 케네디센터 워싱턴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등 뉴욕에서만 40여편의 무대미술작업 및 벽화, 패션섬유미술 작업을 맡았다. 국내에서도 대한민국연극제 및 백상예술대상 무대미술상을 수상한 ‘자전거’를 비롯해 ‘비옹사옹’,‘꼽추왕국’등 극평론가협회상, 동아연극상 등 수많은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세종문화회관에서 벌어졌던 ‘초가집 무단철거’ 에피소드는 당시 공연관계자들간에 유명한 일화다. 무대 세트인 초가집을 합판으로 엉성하게 만들어놓은 것을 보고 그가 지적하자 ‘외국에서 살다와서 초가집도 제대로 모르면서....’하는 소리가 돌아왔다.

그러자 그가 바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망치로 다 부숴버린 것. 목수들이 화를 내며 돌아간 뒤 그는 다음날까지 자신이 직접 사람들을 동원해가며 완벽한 초가집을 제작해 목수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신 극장장의 강단과 능력을 드러내는 일화다.

■ 마침내 꿈이 눈 앞에


신 극장장의 야심작 1탄이었던 공연예술박물관 설립 작업도 오는 11월쯤이면 깃발을 올린다. 역시 ‘국내 최초’로 기록될 박물관이다. 우리 공연예술계의 땀내와 자취를 보여주는 국립극장 소장품 10만점을 보존하게 된다.

“ 정말 여기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고, 취임때도 이 일은 당신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들 해서 왔던 일이예요. 다른 선진국들에는 3백년, 4백년씩 된 박물관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유일하게 공연예술박물관이 없다는게 많이 창피했어요. 유학시절 바깥에선 그런 혜택을 맘껏 누리다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때도 그게 제일 미안했어요. 그래서 ‘그걸 내가 좀 하자. 거기에 극장박물관을 반드시 붙여서 스미스소니언박물관같은 역할을 하게 하자. 그걸로 한국의 정체성을 세우자’고 계획했죠. 여기엔 아주 정제되면서도 고급인 작품들로 콘텐츠를 구성하고 싶다. 이미 제 머릿속에 건축 디자인까지 설계 도면이 다 그려져 있어요. 아주 디테일하게요.”

그의 자존심이 또 한번 빛나는 순간이 왔다. 눈이 반짝인다.

“한류는 한류이되 국립극장다운 품격있는 한류를 일으킬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국제 예술사회에서도 당당히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부터가 알아야합니다. 한국 예술이 그렇게 나쁘지 않거든요. 오히려 외국에서는 우리 예술계와 작품을 대단하게 평가하는데 정작 우리 사회 내부에서 자칫 폄하되거나 주눅 들어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특히 현대예술면에서 타국과 비교해봐도 한국은 대단히 앞서 있는 상태입니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터뷰 후, 신 극장장은 자리를 옮겨야했다. 아닌게 아니라, 한국 국립극장을 견학 겸 취재하러 찾아온 벨기에 기자단이 집단으로 이 우아한 한국의 여장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신선희는…

1968년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1977년 뉴욕 폴라코프 무대미술학교 무대디자인과 졸업, 1980년 동 학교 작화과 졸업. 2002년 중앙대학교 대학원 연극학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무대미술아카데미 대표. 한국공연예술아카데미 창설자. 한국무대미술아카데미 창설자. 전 서울예술대학 조교수. 전 (재)서울예술단 이사장 겸 총감독 역임. 미국 및 국내에서 약 150편의 작품 창작(극본 및 연출, 무대미술, 예술총감독으로 활약) 대한민국연극제 무대미술상(‘자전거’.1983), 극평론가협회상(‘비옹사옹’, 1986), 영희연극상(1998)등 수상 다수. 저서 <작화>, 한국무대예술전문인 연수교재 등 다수.


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