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학양성·한글 아름다움 형상화 '한글춤' 공연 준비도 병행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스트리트 댄스… 춤으로 하나되는 세상

지난해 가을, 교통이 통제된 영동대로에는 2,000여명의 시민이 운집해 있었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정해진 거리행진도, 대규모 시위도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같은 동작을 했고 얼굴엔 쑥스러우면서도 화사한 웃음이 가득했다. 강남일대를 생동하게 하는 열기, 대규모 춤판이 벌어진 것이다. ‘춤으로 하나되는 세상!’이란 주제로 펼쳐진 제1회 강남댄스페스티벌은 세계 속에서 강남이 ‘춤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보인 자리였다.

오는 10월 10일부터 12일까지 강남일대를 또 다시 춤의 열기로 가득 채울 제2회 강남댄스페스티벌은 지난해보다 예산도 참여자수도 두 배로 늘었다. 우려 반, 기대 반으로 시작됐던 축제는 성공에 대한 확신으로 물들어갔다. 이 거대한 축제의 중심에는 ‘한글 춤’으로 유명한 이숙재 교수(한양대 생활무용예술학과)가 있다.

“강남구 테헤란로에는 수많은 외국인 종사자가 있어요. 그들과의 소통은 말 이외에도 바디 커뮤니케이션이 큰 부분을 차지하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소통의 방식이 움직임이듯이, 어렵다는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내면 춤은 인종과 나이의 벽을 허물고 가장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소통의 방식이랍니다.”

강남댄스페스티벌의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숙재 교수는 영국의 에딘버러 페스티벌이나 브라질의 리오 카니발처럼 자연스럽게 관광객의 참여를 유도하며 세계적인 춤의 축제로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강남구의 역점사업의 하나로 탄생한 강남댄스페스티벌의 시작은 강남구청 주최로 강남구민의 문화관심도 조사와 페스티벌의 장르를 정하기 위해 음악, 미술, 관광, 무용, 파티 플래너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회의를 하면서 비롯됐다.

강남구청 공무원들은 각 장르를 직접 관람하거나 체험하던 중 이숙재 교수가 안무한 무용공연을 보면서 세계인의 마음을 하나로 응집시켜주는 데는 춤이 가장 빠르겠다는 판단을 했던 것. 이후 춤으로 하나되는 세상을 위한 세부계획은 이숙재 교수의 몫이었다.

“관객들이 직접 춤을 추고 경연하는 페스티벌을 기획했더니 처음엔 많은 분들이 우려했어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얼마나 열성적일까 했던 거죠. 무용에는 직접 참여와 간접 참여가 있는데, 간접적인 참여를 할 수 있는 무용공연축제는 이미 있었습니다. 관객들이 직접 춤을 춰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예상은 적중했다.

팀워크와 관객의 호응도가 심사기준인 경연대회에서 아마추어와 프로 무용단이 우승을 겨뤘고 무용을 전공하지 않은 순수 동호인 팀이 1위를 차지했다.

영동대로 위에서 2,000여명의 서울시민이 추는 스트리트 댄스는 그 길을 지나던 구경꾼들까지도 흡수했다. 올해는 200여 팀이 경연대회에 참여하고 4,000여명의 스트리트 댄서가 장관을 이룰 예정이다. 강남구의 예산은 작년 5억에서 10억으로, 대상 수상자에 대한 상금도 1,000만원에서 2,000만원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경연대회 참가를 위해 예선까지 치르는 등 이미 한 차례의 접전이 있었다.

경연대회와 거리 댄스 이외에도 댄싱페어, 댄스문화포럼, 해외 전통 춤 공연단과 국내외 전문 댄스 팀 등의 초청공연, 마니아 클럽파티, 세계 춤 퍼레이드 등의 다양한 춤의 세계가 삼성역 6번 출구 앞에 마련된 행사장과 영동대로 등 강남일대에서 펼쳐진다.

강남댄스페스티벌의 추진위원장으로서만도 분주한 가을이지만 이숙재 교수는 후학양성에 더해 밀물현대무용단장으로서 지난 18년간 꾸준히 무대화 해온 한글 춤의 공연도 앞두고 있다.

‘밀물처럼 계속 진행한다’는 의미를 담은 밀물현대무용단의 이름처럼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녀는 평소 지인들에게 워커홀릭이라고 불릴 만큼 일에 몰두하는 스타일이다. 스스로를 단련하고 공연을 위해 계속해서 한글에 대한 연구를 하지만 그녀의 춤에 대한 철학은 의외로 단순하다.

“관객이 봤을 때, ‘아, 벌써 공연이 끝났어?’ 할 정도로 빠져들어야 합니다. 첫째가 재미죠. 감동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더 알고 싶어하거든요. 명화는 시간이 흘러 줄거리는 잊혀질지언정 한두 컷의 명 장면만은 평생 기억에 남잖아요. 그 몇 장면을 위해 감독은 수 개월을 고민하고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춤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저는 계속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한글 춤은 유학시절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시간이 계기가 됐다. 한국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고민하던 중 뉴욕대학 내에 있던 한국문화원에서 자료를 찾다가 한글이 단순한 기호가 아닌 역사와 철학, 종교, 문화의 총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5,6년 동안 한글학회와 세종대왕기념협회에서의 조사를 통해 우리 문화를 알리는 춤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이응노 화백이나 한창조 조각가 등 여타 시각예술분야에서는 이미 한글이 좋은 소재가 되고 있었다. 몇몇의 예술가들이 한글에 내재된 예술적 가치에 눈을 떴던 것이다. 그러나 한글을 그녀가 처음으로 춤으로 승화시키고자 할 때는 많은 이들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무용의 소재로서의 한글에는 다들 난색을 표했어요. 교과서적이거나 혹은 새마을 운동적인 소재가 아닐까라는 우려가 있었고 한글학회에서는 세종대왕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냐며 불편해하기도 하셨습니다. 직접 작품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어요. 공연을 보신 이후에는 한글학회장님은 물론 많은 분들이 후원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춤으로 형상화하기에 앞서 그녀는 한글에 대한 이론으로 무장했고 그렇게 첫 작품 <홀소리 닿소리>가 완성되었다. 많은 이들이 한글의 아름다움에 감탄했고 한글과 무용이라는 두 개의 시각예술의 만남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글 춤을 통해 무용계의 내로라하는 수많은 상도 휩쓸었다.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들은 어떤 반응일까 궁금했지만 해외에서의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한글을 달리 영어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 이나 이라는 타이틀로 공연을 했는데, 공연이 끝나고 ‘도대체 무용의 소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아름답냐’고 묻는 외국인들이 많았어요.

한글이라고 하면 다들 깜짝 놀라셨죠.” 감동을 물건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관객들은 공연 후 모자나 티셔츠 등의 상품을 사고 싶어했고 그녀 역시 이들을 위해 한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제품을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모자에는 모두 영어 단어만 적혀 있었고 제가 생각하던 이미지는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일본의 패션디자이너인 이세이 미야키의 옷을 보면 기모노를 직접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보는 순간 기모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디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글의 ‘가’라고 했을 때, 사실적으로 ‘가’를 쓰기보다는 그런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한글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또 그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하고 있는 그녀가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아쉬움이었다. 그러기에 한글의 시각적 가능성을 열어가는 예술가들에 대해 그녀는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세계적인 시각디자이너 안상수 교수와 지속적인 교류를 하는 모습이나 SK본사에 위치한 nabi갤러리에서 열리는 한글 관련 디자인 전시에서 오프닝 무대를 여는 모습에서도 그녀의 애정 어린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언어로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에 훈민정음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1997년)되었고, 유네스코의 문명퇴치상인 세종대왕상(1989년)이 제정되었다. 한글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지만 훈민정음에 담긴 민주주의 사상과 세종대왕의 박애의 정신, 훈민정음 반포 6개월 전 일종의 CM송이었던 ‘용비어천가’로 실용적인 한글의 가능성을 시험해보았던 치밀함 등에 대한 이야기가 끝을 모르고 계속됐다.

“한글에 담긴 정신을 세계에 퍼뜨리고 싶었습니다. 그 의미를 함축적으로 승화시켜보니 인종은 다를지언정 감동을 느끼는 건 다 같아 보였거든요.” 오는 10월 14일과 15일, 이숙재 교수는 ‘한글에 대한 국가의 정책’에 대한 일종의 ‘고발’적인 내용을 담은 1부와 한글의 실용성과 과학성,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2부로 구성된 공연 <한글 춤 2350>을 통해 한글 춤에 새로운 변화와 진지한 성찰을 담아낸다.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국내와 해외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한글의 정신에 담긴 ‘음과 양’, ‘하늘과 땅, 그리소 사람’, ‘아담과 이브’와 같은 주제를 제시한 한글 페스티벌을 여는 것이 저의 계획이자 꿈입니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는 그녀의 눈이 유난히 반짝인다.

◇ 이숙재 교수는

이화여대 및 동 대학원 무용과 졸업, 뉴욕대학교 석사학위와 건국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현재 한양대학교 생활무용예술학과 교수, (사) 밀물무용예술원 이사장, M극장 대표, 한국무용학회 회장, 강남댄스페스티벌 추진위원장, 한국현대무용협회 회장 역임, 한양대 생활체육과학대학장 역임, 서울무용제 대상 및 안무상(1993), 한국예술평론가협회의 최우수 예술가상(2005), 한국무용학회의 무용대상(2005) 등을 수상했다.


이인선 객원기자 sun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