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이프'로 남녀 대결구도 아닌 여성 정체성·소수자인권에 집중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처럼 거센 반감을 사고 있는 용어도 드물다. 지난 10여 년 간 페미니즘 진영과 격렬한 논쟁을 벌여온 마초(남성우월주의자)들은 결국 이들을 ‘꼴통 페미’라고 명명하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꼴통 페미’라는 단어의 이면에는 페미니스트들의 막강한 ‘공격력’에 대한 마초 남성들의 무력감도 함께 담겨 있다. 그만큼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 특히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IF)’(이하 이프)의 활동은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며 한국 사회의 공고한 가부장제 구조와 전투를 벌여왔다.

지난 7월 엄을순 현 대표와 함께 이프의 공동대표로 선출된 유숙렬 대표는 말 그대로 이프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문화일보 기자 출신으로 이프 창간 과정부터 편집위원, 이사 등으로 10년간 다양한 여성 이슈를 발굴해냈던 그는 2006년 이프가 완간된 후 여성문화운동단체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주도해왔다.

하지만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완간 전의 상황에 비하면 완간 이후의 이프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게 사실이다.

“나름대로 활동은 계속 해왔어요. 지난해에는 고액 화폐 인물 선정과 관련해서 한국은행 측이 선정한 신사임당에 반대하는 기자회견도 했었어요.” 과연 지난해 새로운 화폐 발행 건에서 여성 인물의 선정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올랐었다.

그 결과 한국은행 측은 숙고 끝에 신사임당을 선정했었지만 이프를 비롯한 여성계는 이에 반대했다. 신사임당은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낸 현모양처 이미지에 부합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인물로는 적절치 못하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제가 꾸준히 발굴되지 않는 이상 페미니즘이 사람들에 항상 가까이 다가가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유 대표는 웹진 발행을 준비하며 새로운 이프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프 완간 이후에 단행본 ‘여성경험총서’를 계속 출판했는데, 단행본은 목소리를 내는 데 한계가 있잖아요. 아무래도 대 사회적 활동을 더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역시 매체의 힘이 있어야겠죠. 그래서 웹진 ‘위클리 이프’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다시 태어나는 이프는 기존의 필진들이 자신의 웹 공간에 칼럼을 기고하는 형식을 기본으로, 오마이뉴스식 시민기자제와 프레시안식 전문기자제가 더해진 형태로 진행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변화는 남자가 편집장을 맡는다는 것이다. 온라인 이프에 올라오는 글들도 남성 대 여성의 대결 구도보다는 여성 정체성과 소수자 인권에 집중하면서 한층 온화해졌다.

이프의, 그리고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시대에 따른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유 대표는 ‘노쇠한 페미니즘?’이라며 농을 던진다. “싸울 기운을 잃어버려서라기보다는 사회가 변한 까닭이 큽니다. 이런 사회의 변화에 따라 페미니즘도 ‘공격하는 페미니즘’보다는 ‘함께 하는 페미니즘’으로 변화해가고 있거든요. 남자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함께 가는 페미니즘을 지향해보자, 라는 게 새로운 이프의 가장 큰 변화일 겁니다.”

가부장 사회의 충실한 교육을 받아온 남성들이 이프의 급진적인 구호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일면 당연했다. 여성 인권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도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이라는 고착화된 유교 논리는 강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이 빈번해지면서 많은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을 압도하고 있고, 무엇보다 가정에서 가부장이 힘을 잃거나 구성원과 평준화되면서 사회 인식은 조금씩 바뀌어왔다.

“예전에는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도 했어요. 우리가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데 ‘가해자’들 교육까지 해야 하느냐고(웃음). 그 당시는 여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그런 남자들에 대한 공격만으로도 페미니즘이 할 게 많았죠. 하지만 지금은 남자들하고 함께 하지 않으면 어려워요. 요즈음은 매맞는 남자들도 있고, 육아휴직하는 남편들도 있거든요.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 남자를 포용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합니다. 같이 살겠다는 거죠, 남자와 여자가.”

가부장 사회에 대해 투쟁하는 ‘전사’의 이미지 대신, 이제는 남성에게 손을 내미는 페미니즘으로의 변화는 더 이상 반목이 아닌 상생의 길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듯하다. 물론 이들 사이에 병역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군대 문제는 정치×종교 문제와 함께 사적 대화에서 금기시되는 토픽으로 꼽힐 정도지만, 정치×종교 문제가 다양한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병역 문제의 끝은 대개 여성 문제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여기에 군 가산점 문제가 등장하면 양성의 감정싸움은 더욱 격렬해진다. 유 대표도 이러한 소모적 논쟁 구조에 목소리를 냈다가 오히려 더욱 불씨를 당기기도 했다.

“남자들의 불만이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죠. 남녀평등의 입장에서 보면 군대는 명백히 불평등한 거에요. 이제 여자들도 군대를 간다고는 하지만 장교로만 지원하고 사병은 가지 않잖아요. 이건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이프에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라는 요지의 글을 썼다가 여성들, 특히 페미니스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적도 있어요. 대신 마초 남성들에게는 열렬히 환호를 받았죠(웃음).”

군대와 출산이 등가적으로 다루어지는 현실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담론이 더 다양하게 전개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아울러 페미니즘이 여성들만의, 그들만의 논의가 아니라 주류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 모든 소수자들의 삶의 목소리임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2005년 유 대표가 낸 시집 ‘외로워서’를 읽고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다는 독자들의 단평은 그래서 의미있게 다가온다. 어쩌면 이 같은 ‘여성을 위한’보다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유 대표는 앞으로의 이프의 변화에 대한 질문에 “이제까지 계속 해오던 작업을 할 것”이라고 담담하게 답한다. “결국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간 선언이고 소수자에 대한 배려의 눈길이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페미니즘이 ‘이기적 취향’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바로잡는 활동을 통해 그런 인식들을 바꿔나가려고 합니다.” 오는 10월 22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여성전용파티 시청 앞 밤마실 安안全전夜야行행’은 그 좋은 예가 될 듯하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가치들이 공정하게 존중받는 것. 그러기 위해 페미니즘이 주류 사회를 향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사회가 이를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것. 바로 유 대표와 이프가 꿈꾸는 유토피아다. 비록 그런 사회가 올지는 요원하지만, 유 대표는 오늘도 그런 사회를 꿈꾸며 이프의 동지들과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 유숙렬 이프 대표는…

서강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뉴욕 헌터컬리지 여성학 학부과정, 뉴욕시립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문화일보에 입사하여 2004년까지 생활부, 국제부, 문화부를 거쳐 여성팀장, 생활부장, 여성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1992년 페미니즘 연극'자기만의 방'대본을 집필했으며,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번역 출간하였다. 페미니스터저널 '이프' 창간부터 완간까지 편집위원을 지냈다. 작품으로「한국에 페미니스트는 있는가」「외로워서」등이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