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울림으로 남겨진 한국포크의 컬트

[추억의 LP여행] 박찬응(上)

큰 울림으로 남겨진 한국포크의 컬트

음반 콜렉터들 사이에 100만원을 호가하는 김의철의 데뷔 음반에는 한 여가수가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노래한 '섬아이', '평화로운 강물' 등 두 곡이 수록돼 있다. 가요 사상 유래가 없는 '창법 미숙'이라는 이유로 금지 명찰을 단 여성 포크 가수의 노래다. 노래의 주인공은 당시 서강대 영문과 여대생이었던 박찬응.

금지의 멍에로 이름조차 생소한 그녀의 노래는 단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처절하게 가슴속을 파고드는 강력한 소리의 이미지에 충격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놀라움을 안겨주는 어둡고 괴상한 창법의 이 노래가 유신 정권 하에서 금지곡 리스트에 올랐던 것은 당연했으리라.

하지만 독특한 그녀의 허스키 창법은 한국 가요 사상 가장 처절하고 슬픈 울림으로 포크 마니아들은 받아 들인다. 가히 한국 포크의 컬트로 여길 만큼 철저하게 숨겨진 명곡이다. 그래서인가, 이름조차 생소한 포크 가수 박찬응의 노래는 포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양희은의 '아침 이슬', 현경과 영애의 '아름다운 사람', 한대수의 '바람과 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해, '가장 좋아하는 70년대 포크가요 순위' 6위에 당당하게 올라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진가는 포크 가수에서 판소리 대가로 변신해 현재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한국학 교수가 되어 한국의 소리와 얼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특이한 이력의 소리꾼이라는 점에서 빛을 발한다.

박찬응은 1951년 11월 14일 영문학도로 해군사관학교 통역 장교일에 종사해 한국 외국어대 대학원장을 역임한 부친 박규서씨와, 모시적삼에 쪽을 끼고 살만큼 전통적인 삶을 고집했던 모친 김기순씨 사이의 1남 4녀 중 막내로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서양적 냄새가 강했던 진보적인 부친과 한국적 향내가 물씬 풍겼던 모친으로 인해 그녀의 가정 분위기는 진보와 보수가 묘하게 공존했다. 특이한 가풍 속에서 성장한 그녀의 집안에는 사실 음악과 연관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전통 민요를 즐겨 들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수심가’, ‘회심곡’ 등을 듣고 자란 덕에, 제법 구성진 가락으로 민요를 불러 부모님과 주위의 귀여움을 받았다.

4살 때 서울 청운동으로 이사를 왔다. 포크가수 양병집은 그녀의 청운초등학교 동창. 박찬응은 개구쟁이처럼 뛰어 놀기를 좋아했던 쾌활한 성격이었다.

박찬응은 어려서부터 유행가보다는 전통 민요를 유독 좋아했다. 책임감이 강했던 그녀는 교내 합창반원으로 활약했지만 비범한 편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는 어린아이의 소리로 동요를 불렀기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한국 가락이 아닌 서양노래를 배워야 했던 중ㆍ고교 6년 간의 음악 시간은 고통이었다. 그녀의 목청은 특이했다.

박찬응은 "기본 창법이 달라 정말 괴로웠다. 친구들은 다 서양식 가성이 나오는데 이상하게 나 혼자만은 나오지 않았다. 늘 목이 쉬어 있어, 친구들의 놀림감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국악을 해야 하는 목소리임을 아무도 몰랐다. 경기여중에 진학하면서 팝송을 접했다. 중3때 서오능으로 소풍을 가 당시 유행하던 폴 앵커와 카니 프란시스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러 인기를 모으면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법 인기가 높았다.

당시 그녀는 오빠가 조립해 만든 전축을 통해 스탠더드 팝과 롤링 스톤즈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명석했던 박찬응은 명문 경기여고에 진학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점차 생겨나며 활달하던 성격이 다소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1969년 서강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영어 연극반에 참여하며 뮤지컬과 연극에 빠져들었다. 미국 미시간대 연극학 박사인 이원복과 연출가 김성만, 이향우등은 당시 드라마센터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기들. 연극에 정신을 빼앗긴 그녀는 학업 쪽으로 정진하기를 바랬던 가족들에겐 미운 오리 새끼로 변해갔다.

당시 전 세계는 월남전에 반대하는 반전의 젊은 기운이 드셌던 히피 문화 시대였다. 암울하고 보수적이었던 70년대 시대 상황 속에서 활동적이고 튀는 여자 박찬응의 이미지는 '정상이 아닌 년'이라는 유교적 편견으로 일그러졌다. 고무신을 신고 다니고 한복을 뚝뚝 짤라 개량하여 입고 담배를 피는 모습은 가족과 사회 양쪽 모두로부터 이상한 여자로 취급당했다.

순수한 영혼으로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였던 한국의 짚시 박찬응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감당하기 힘든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대학 2학년 때 경기여고 1년 후배 양희은이 대학 후배로 들어오면서 노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강대페스티발 때 대학친구 박경애와 사이몬&가펑클의 노래로 축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사랑하는 어머님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막내로 자란 그녀는 의지할 곳이 없는 현실에 심적 고통이 컸다. 이때부터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의 음악이 가슴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현실의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더욱 연극에 몰두하며 위안을 찾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번역사로 일하던 중, 서유석에게 팝송 몇 곡을 번안해 줘 기타가 생겼다. 이때부터 밥 딜런, 존 바에즈, 멜라니 사프카의 노래를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갑자기 콘서트를 열고 싶어 졌다. 기타를 잘 친다는 연세대 박두호를 찾아 '내쉬빌'로 찾아갔다. 단박에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연대 유공과 뒤 잔디밭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장안의 멋쟁이들이 다 모여든 이날 야외 콘서트에서 뒤늦게 한국 포크의 대부로 떠오르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김의철과의 숙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