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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되돌리기]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그녀들의 이유있는 히스테리



200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미술관에서 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렸다. 영상디자인이 가히 혁명적일 만큼 진화하면서 영화 안에서 단 몇 분에 불과한 타이틀도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타이틀의 등장(영화 포스터와 함께)은 영화 역사상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광고 디자이너였던 솔바스가 1955년 영화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에서 일러스트 영상을 만든 것이 영화 타이틀의 시초다. 그 후 솔바스는 영화 <현기증>에서 소용돌이치는 옵티컬 아트를 선보여 관객을 그야말로 현기증에 빠뜨렸다.

90년대 들어서는 디자이너 카일 쿠퍼가 영화 <세븐>에서 거칠게 편집된 화면과 낙서같은 타이포그라피를 통해 연쇄살인범의 편집증적인 면모를 표현하기도 했다. 카일 쿠퍼의 다른 작품인 <닥터 모로의 DNA>의 타이틀도 볼만하다.

타이틀은 독립된 영상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영화의 내용을 암시하거나 주제를 축약해서 보여주는데 큰 의미가 있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 포스터와 오프닝 타이틀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모두 디자이너 후앙 가티의 작품으로 화려하고 통속적인 패션잡지 속 모델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특히 포스터에는 분할된 여성의 신체가 등장하는데 이는 페미니즘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 방식이다. 흔히 파편화되고 분할된 여성의 신체 이미지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 재단되고 소비되는 여성성을 의미한다.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로 유명한 바바라 크루거는 거울 속에서 조각난 여성의 얼굴 위로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를 써넣음으로써 남성의 시선이 여성의 몸을 소유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의 포스터나 오프닝에서도 이러한 페미니즘적인 의미를 찾아볼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과연 페미니즘적인 영화인가? 우선 영화는 <그녀에게>, <내 어머니의 모든 것>으로 유명한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1988년 작품이다. 주인공은 대부분 여자고 모두 남자에게 버림받은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그야말로 신경쇠약 직전에 다다른 상황. 그래서 여자들은 방화를 저지르거나 자살을 감행하거나 혹은 살인을 계획해서 뭔가 탈출구를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그 과정들이 심상치 않다. 다들 심각하게 일을 도모하지만 관객에겐 어딘지 우스꽝스럽고 유쾌하다. 특히 주인공 페파가 찍은 세제 광고는 이 영화가 블랙 코미디임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광고 속에서 페파는 살인범의 엄마로 나와 아들이 범행당시 입었던 피묻은 셔츠를 말끔히 세탁해서 경찰들을 당황케 한 후 예쁜 포즈를 취하며 ‘00세제’를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또 방화로 침대를 완전 연소시켜 버리고도, 홧김에 전화기를 두 번씩이나 박살을 내버리고도 여전히 태연자약하다. 오로지 변심한 애인의 맘을 되돌리는 것에만 열중할 뿐이다. 관객은 고상하게 잘 차려 입은 여인이 사생결단으로 애인을 추적하지만 절묘하게 번번이 스쳐 지나가고 그럴 때마다 매번 같은 택시를 타는 것을 보면서 엉뚱하고 부조리하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영화 속 현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 페파는 남자에게 버림받은 비극 속에서 또 다른 자아를 만나게 된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은 분명 페미니즘적인 영화다. 포스터나 오프닝에서 잘 차려 입은 여성 모델을 등장시켜서 저속하고 번지르르한 삶의 통속성을 극대화시켜 놓고 정확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다. 하지만 스페인식 코미디만을 기대하는 사람이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영화이기도 하다.



장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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