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톱세운 LG 선제 포화… 삼성 "어딜 넘봐" 코웃음

섬성 vs LG "밟아라, 1등으로 올라서라"

발톱세운 LG 선제 포화… 삼성 "어딜 넘봐" 코웃음

보수적 혹은 내성적. LG의 기업문화적 색채는 그랬다. 경영 이념에서 언제나 ‘인화(人和)’라는 단어가 가장 선두에 있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좋은 표현으로 하자면 ‘인간미가 풀풀 풍기는 기업’이었고, 나쁜 평가를 빌자면 ‘모험심이 부족한 기업’이었다.

1947년 구인회씨와 사돈 허만정씨가 함께 손을 잡고 락희화학(현 LG화학)을 창업한 이래 57년간 대를 이어 두 가문이 동업 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런 LG에게 지난해 1월초 구본무 회장의 신년사는 파격적이었다. 시무식에 참석한 구 회장은 10분 남짓한 신년사에서 ‘1등’이라는 단어를 무려 13차례나 사용했다.

“외환 위기 이후 지금까지의 당면 과제가 생존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다. 지금은 1등이 아닌 기업은 인정해주지 않으며 경영 환경이 어려울수록 1등 기업은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경쟁사들도 배우고 싶어하는 ‘1등 LG’가 되자.” ‘만년 2등’ 에 안분자족하던 LG가 ‘1등 LG’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보수 경영에서 공격 경영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구 회장은 ‘1등’이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녔다. 사용하는 용어도 점점 독해졌다. “기필코 1등을 달성하고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 해내겠다는 ‘도전 정신’, 시작했으면 집요하게 파고 들어 끝을 내는 ‘승부 근성’이 가장 중요하다.”(지난해 3월 임원 세미나)

물론 구 회장의 일련의 발언들은 부동의 1위 자리를 꿰차고 있는 삼성을 겨냥한 성격이 다분했다. 직원들을 독려해 1등 삼성을 따라잡겠다는 의지이기도 했고, ‘삼성 독주 체제’가 아닌 ‘삼성-LG 양강 체제’임을 널리 알리겠다는 홍보 전략이기도 했다. 그리고 올들어 삼성을 향한 LG의 거센, 노골적인 공세가 시작됐다.


"삼성전자 임원은 전범" 첫 포문

구본준 LG필립스 LCD 사장은 4월 중순 일본 도쿄에서 열린 디스플레이 전문 전시회 ‘EDEX 2003’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독설을 내뱉었다.

“삼성전자가 LCD 부문에서 최근 LG에 1등을 내준 것은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패배와 비슷한 것으로 5년 연속 세계 1위에 자만해 양산기술 습득을 게을리한 탓이다. 전쟁을 이끈 임직원들은 전범이나 마찬가지다.” 그 무렵 LG필립스LCD가 LCD 생산 규모에서 삼성전자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선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삼성전자는 경제 전쟁의 패배자였고, 전쟁을 지휘한 임직원은 2차 대전에서 미국에 패한 일본의 전범과 같다는 논리였다.

발언의 배경을 두고 재계에서 흘러나온 유력한 해석은 LCD 규격 표준을 놓고 삼성전자에게 4, 5세대가 모두 패배를 하자 구 사장의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다는 것이었다. 삼성이 택한 4, 5세대(14.1인치와 17인치)가 LG의 4, 5세대(13.3인치와 18인치)를 제치고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LG가 막대한 추가 비용을 부담하게 된 것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재계가 또 하나 주목한 것은 구 사장이 ‘1등 LG’를 독려해 온 구 회장의 친동생이라는 점. 당시 재계 한 관계자는 “삼성을 밟고 일어서야 LG가 1등을 할 수 있다는 경영 이념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가 아니겠느냐”며 혀를 찼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삼성전자측은 입을 다물었다. “최고 경영자로서 어떻게 그런 망언을 할 수 있느냐” “잠시 1위를 차지한 것을 두고 마치 삼성을 제친 것처럼 말하는 게 어이가 없다”는 내부의 수근거림도 금세 사그러들었다.

삼성전자 한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논의가 있었지만 고의성 있는 과도한 발언에 대해 대응을 하는 것 자체가 별로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리는 글로벌 기업들과 1위를 다투는 것이지 국내사들과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했다. 구 사장은 어쩌면 확전을 통한 공론화를 원했는지도 모르지만 사태는 그렇게 일단락됐다.


LG의 전방위 공세

하지만 이른바 ‘전범 발언 사태’ 이후 삼성을 향한 LG의 공세는 곳곳에서 이뤄졌다. 5월 중순 LG전자가 40%의 지분을 갖고 있는 LG IBM의 노트북PC ‘씽크패드 R40’ 일간지 광고. 삼성전자의 신형 노트북 PC인 ‘센스 X10’을 연상시키는 제품에 대해 ‘넌센스’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센스’ 제품에 대해 ‘넌센스’라고 조롱하는 기발한 언어 유희인 셈이었다. 특히 ‘무선 수신은 오락가락, 배터리는 한 두시간 마다 켜졌다 꺼졌다, 금방 뜨거워져서 무릎에 놓고 쓰지 못하는 노트북’이라며 센스 제품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센스 X10’ 제품은 배터리 용량을 줄이는 바람에 배터리 사용 시간이 줄어들고, 발열량도 경쟁사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 가뜩이나 전범 발언 이후 감정이 상해있던 삼성전자측은 “비교 광고를 넘어선 비방 광고”라며 LG IBM측에 항의 공문을 보내는 등 적극 대응했다.

카드업계에서도 LG와 삼성은 충돌했다. LG카드가 유상 증자를, 삼성카드가 후순위 전환사채(CB) 발행을 앞두고 있던 6월초. 한 증권사가 “삼성카드 CB의 안정성과 수익률 면에서 LG카드 주식보다 낫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낸 것이 발단이었다. LG측은 발끈했다.

한 관계자는 “아직 상장도 되지 않은 회사의 CB와 상장 주식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상식을 벗어난 일”이라고 흥분했다. LG측은 담당 애널리스트에게 “LG카드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냐”며 항의를 했고, 결국 LG 유상증자 참여의 장점에 대해서도 코멘트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재계의 창구인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둘러싸고도 두 재벌의 신경전이 표출됐다. 전경련이 2월 손길승 회장과 함께 삼성 출신 현명관 상근 부회장 체제로 정비된 이후 LG측은 줄곧 전경련이 삼성측에 편향된 행보를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눈총을 보냈다.

전경련이 6월초 “국내 S사는 1999년부터 4년간 법인세로 약 4조9,000억원을 납부했으나, 외국인투자기업 L사는 7년간 조세 감면 혜택을 받았다”며 역차별 사례로 삼성전자와 LG필립스를 지목한 것 등 크고 작은 사례들은 LG측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LG를 비롯한 재계에서는 심지어 “전경련이 아니라 삼경련이다”는 노골적인 불만이 흘러나왔다.

전경련 내부 삼성-LG 불화설이 공식 확인된 것은 6월 중순, 구본무 LG 회장이 몇몇 기자들에게 “우리 회사 사람들 중 몇몇은 왜 전경련 회비를 내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며 불만을 털어놓으면서부터. 이후 실제 LG는 손 회장-현 부회장 체제가 출범한 다음달인 3월부터 월 6,000만원 가량의 전경련 회비를 내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물론 ‘항의성 회비 납부 거부’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천재론' vs 'CEO 육성론'

LG와 삼성의 대립각은 두 그룹 총수의 설전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LG 구본무 회장은 6월2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LG칼텍스정유 주주 회의에 참석한 뒤 귀국하던 기내에서 기자들에게 좋은 기사 거리를 제공했다.

“한 두사람의 천재가 수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보름 전 “나라를 위해 천재 육성에 주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삼성 이건희 회장에 직격탄을 날린 것. 구 회장은 “그런 천재는 따돌림을 당하기 쉽고 회사 내에서 위화감이 생길 수 있다. 천재보다는 훌륭한 최고경영자(CEO) 양성이 중요하다”며 이 회장의 ‘천재론’에 맞서 ‘CEO 육성론’을 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그룹 총수의 설전은 세인의 화제 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한 헤드헌팅업체가 발 빠르게 직장인을 대상으로 ‘천재론’과 ‘CEO 육성론’ 중 어느 것에 더 동감하는지 설문을 실시하는 등 파장은 확산됐다. 설문 조사 결과 직장인 69%가 구 회장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 회장 편에 선 직장인은 21%에 그쳐 LG측의 여론 몰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연일 LG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삼성은 속으로만 끙끙 앓을 뿐 공식적으로는 일절 내색을 않는 분위기다. 삼성 구조본 관계자는 “CEO 육성론이나 천재론이나 다 비슷한 맥락인데 결국은 LG의 홍보 전략이 아니겠느냐”며 “LG를 경쟁 상대로 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는 우리로서는 일일이 대응할 필요조차 못 느끼고 있다”고 일축했다.


삼성 독주 체제에 흠집을 낼 수 있을까

대우, 현대, 그리고 최근 SK까지 과거 5대 그룹 중 3개 그룹이 외환 위기 이후 해체되거나 휘청대면서 삼성과 LG는 현재 각 업종에서 충돌하는 양상이다. 전자, 증권, 건설, 카드, 손해보험, 시스템통합(SI), 유통….

하지만 LG의 바람과 달리 삼성의 독주 체제가 흔들릴 여지는 당분간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삼성의 아성은 우선 경영 실적에서 확연하다. 지난해 삼성그룹 총매출액은 96조원. 거래소 상장 510개 12월 결산법인 총매출액(495조원)의 20%에 육박하는 수치다. 순익은 8조3,000억원으로 전체 순익(24조원)의 3분의 1을 넘어섰다.

우리 산업의 핵심 업종 판도에서도 ‘1위 삼성’의 영향력은 두드러진다. 삼성은 반도체, 액정화면(TFT-LCD), 브라운관(CPT), 가전, 생명보험, 손해보험 등에서 시장 점유율을 갈수록 높여 가며 부동의 1위를 구축하고 있고, 최근 1~2년새 증권과 건설 등 취약 업종에서도 단숨에 1위로 솟구쳤다. LG의 겁 없는 도전에 삼성이 “감히 어딜 넘봐”라며 코웃음을 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줄곧 삼성을 향해 발톱을 세우던 LG는 최근 유화 제스처를 보여줬다. LG전자 디지털 디스플레이 & 미디어 사업본부장 우남균 사장이 이례적으로 ‘삼성 예찬론’을 들고 나온 것. 우 사장은 7월초 경북 구미공장에서 열린 ‘엑스캔버스 신기술 발표회’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삼성을 칭찬했다.

“지금 LG의 디지털 TV 기술은 일본을 능가할 정도로 세계 최고다. 그동안 삼성과의 경쟁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삼성전자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날 발표회는 LG측이 세계 최대크기 71인치 자이언츠 PDP TV 등을 소개하는 자리였기에 우 사장의 발언은 더욱 뜻밖이었다.

LG전자 관계자는 “말 그대로 이해해 달라.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삼성측은 또 다시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삼성 구조본 관계자는 끝내 의구심을 지우지 않으며 이렇게 되받았다. “속내를 알 수가 없으니…. 진작에 그렇게 나왔어야죠. LG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보수적인 경영 덕이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리한 공격 경영을 한다면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영태 기자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