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사장 취임 이후 첨예한 대립각, 'KBS때리기' 불만고조

KBS號, 한나라를 들이받아?

정연주 사장 취임 이후 첨예한 대립각, 'KBS때리기' 불만고조

7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KBS의 2002년도 예산결산 승인안이 부결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KBS 경영진의 모습은 패닉 상태에 가까웠다. 국회 문화관광위가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 결산안이 본회의에서 뒤집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KBS는 결산안 부결이라는 사상 전례가 없는 사태의 배경과 향후 미칠 파장을 가늠하느라 정책기획센터, 사내 법무팀, 국회 출입기자를 총동원해 정보 수집에 나섰다. 시간이 지나고 본회의장에서 “정연주 사장 취임 후 KBS가 이념적 편향을 보이고 있다” 는 등 전년도 결산보고와 관계없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강도 높은 비판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KBS 내에서는 “해도 너무 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결산안 부결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수면 아래에 숨어 있는 정연주 사장 체제에 대한 한나라당의 적대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모습은 지난 4월 정연주 호 출범 이후 줄곧 이어져 온 한나라당과 KBS의 불편한 관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나라당은 “KBS 이사회가 노무현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정연주씨를 사장으로 임명 제청했다”는 유감 논평 시작으로 정 사장과 두 아들의 병역문제, ‘노사모’ 출신 문성근씨의 ‘인물현대사’ 진행자 내정, 1라디오의 장애인 방송 및 국군방송 폐지 등을 둘러싸고 번번이 KBS와 대립각을 세웠다.

급기야 6월 19일에는 MBC와 KBS 2TV를 올해 안에 민영화하고, KBS 수신료 폐지도 검토하겠다는 ‘방송개혁안’까지 발표했다. 한나라당 언론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하순봉)는 “최근 공영방송 KBS가 보여주는 정치적 편파성과 이념적 편향성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한나라당의 ‘KBS 때리기’에는 보수언론도 가세했다. 정 사장은 한겨레 신문 논설주간 시절 ‘조중동’을 조폭언론으로 빗대며 신문 권력의 독과점 폐해를 주장해 왔다. 정 사장이 보수 언론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정 사장 본인과 두 아들의 병역면제 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사회 고위층의 부도덕한 병역 면제와 연관시키려 했고, 지명관 전 KBS 이사장이 정연주 사장을 겨냥해 발언한 원색적인 비난을 여과 없이 중계하기도 했다.


이젠 과거의 얌전한 KBS가 아니다

KBS는 한나라당의 2TV 민영화 계획에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김충환 KBS 홍보실장은 “2TV가 민영화될 경우 방송의 상업화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며 “외국의 공영방송 사례를 봐도 2TV와 같은 보완적 성격의 채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KBS의 이런 입장은 정 사장이 취임 초기 기자간담회에서도 명확히 밝힌 적이 있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 사장은 칼럼에서 공영방송의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유달리 강조해 왔다. KBS 노조도 “2TV 민영화와 수신료 폐지, 그리고 MBC 민영화와 감사원 감사 추진은 서로 모순된 주장”이라며 “한나라당의 주장은 일회적이고 급조된 것”이라고 일축했다.

과거에도 KBS에 대한 비판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2TV의 선정성, 기계적 객관주의, 현안을 외면하는 보도, 사장의 제왕적 권력, 뿌리깊은 관료주의 등이 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그러나 최근의 비판은 정 사장의 신상 문제나 방송 이념의 편향성 등 주로 정치적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KBS 노조가 한나라당의 잇?‘KBS 때리기’에는 방송 길들이기라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노조는 결산안이 부결된 직후 성명서를 내고 “결산안 부결은 지난 대선 패배에 대한 분풀이에 다름 아니며 공영방송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기 위한 시도”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정 사장의 KBS 호(號)가 이전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바로 KBS가 더 이상 보수언론과 ‘침묵의 카르텔’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방송개혁안 소식을 소극적으로 다룬 KBS 보도 태도에 대해 정 사장은 본부장급 임원들을 크게 질책했다는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MBC와 KBS 2TV의 민영화안에 대해 MBC는 비판적 시각에서 비중 있게 다뤘었다. KBS의 한 관계자는 “정연주 사장이 ‘아들 문제로 나를 공격하는 것은 내가 해결한다. 그러나 조직을 흔들겠다고 나서는데 어떻게 당신들이 책임있게 대응하지 않았냐’고 대노했다”고 전했다. KBS는 또 6월 개편에서 신설된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 포커스’을 통해 1라디오의 대통령 주례방송 계획에 대한 보수신문의 보도 태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조간인 조선일보가 만들어 놓은 의제를 저녁 뉴스시간에 거의 무비판적으로 확대 재생산해 내던 KBS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KBS 노보는 최근 사설에서 정연주 사장에 대한 병역시비, ‘인물현대사’ 신설 등에 대한 보수언론의 이념공세는 바로 변화된 KBS가 몰고 올 여론시장의 재편을 염두에 둔 선제 타격성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일선 PD들도 “KBS를 흔들려면 중간에 끝내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KBS에 대한 공격은 정치권의 당리당략이나 경쟁사의 자사 이기주의에서 시작돼 적당히 이득을 얻었을 때쯤이면 중도에 흐지부지 끝났다는 게 KBS의 인식이다.


KBS 개혁 어디로 가나

KBS는 외부의 흔들기에도 불구하고 정 사장의 개혁 깃발 아래 어느 때보다 든든한 내부 결속력을 보여주고 있다. ‘인물현대사’, ‘미디어 포커스’ 신설 등에 대해 현재까지 KBS 내부의 평가도 호의적이다. 노조도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KBS가 변화하고 있다”는 의견에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 노사는 6월 25일 KBS개혁노사특별위원회를 발족했고, 전임 박권상 사장 시절 거의 유명무실화했던 공정방송위도 재가동중이다.

이런 분위기는 정 사장의 탈 권위주의적 행보와도 관련이 깊다. 정 사장은 취임 초 고위 임원실이 모여 있는 본관 6층을 완전 개방하고 제작ㆍ보도ㆍ기술본부장실을 현업 부서가 있는 곳으로 옮기는 상징적인 조치를 취했다. 전임 사장 시절 청경이 지켰던 6층은 KBS 사장의 제왕적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심지어는 ‘정신병동’이라는 불명예 별칭도 갖고 있었다.

권오훈 노조 공방위 간사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제작 지시가 내려오던 관행이 깨지고 일선 제작진의 자율성이 확대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가 KBS의 근본적인 개혁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한나라당의 KBS 흔들기가 가능한 것은 그만큼 공영방송으로서 KBS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KBS 라디오에서 FM 음악프로를 맡고 있는 10년차 현업 PD의 솔직한 고백을 들어보자.

“공영성을 생각한다면 라디오 프로에서 연예인의 말장난을 줄이고 음악 중심으로 방송해야 한다. 하지만 내 프로에 연예인을 출연시키지 않으면 경쟁사 프로의 출연진은 더욱 화려해지고 결국 청취자에게 외면 받게 될 것이다. 이는 곧바로 청취자 사연과 광고 수입의 급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경쟁 구도 하에서는 누구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적당히 타협하고 만다.”

KBS 재원은 광고료와 수신료로 구성된다. 이중 광고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60%. PD들은 일선에서 상업방송과 경쟁해야 하는데, 공영성 강화라는 선언적 주장만으로는 KBS의 근본적인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얘기다. 정 사장은 공영성을 회복한 뒤 수신료를 올려 광고비중을 줄이겠다는 계획이지만, 시청자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아직 요원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밤 중에 전두환씨의 집 앞에서 ‘TV 시위’를 벌여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은 2TV ‘시민프로젝트 나와주세요’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혁 프로그램을 표방하더라도 상투적 내용과 형식 속에 담아서는 KBS의 공영성을 인정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영방송에서 시작해 1973년 공사로 전환됐으나 줄곧 상업방송과의 시청률 경쟁에 몰두해 온 KBS의 과거를 돌아 보면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거듭나겠다는 KBS 몸부림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직 기자에서 한국 방송계의 수장으로 우뚝 선 정연주 사장이 거대한 공룡 KBS의 잠을 깨울 수 있을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김영화 기자


김영화 기자 yaa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