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앞에 우정따윈 사치일 뿐"

[시네마 타운] 청풍명월

"권력 앞에 우정따윈 사치일 뿐"

한국영화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내러티브가 촘촘하지 않고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자주 지적한다. 대중영화는 전통적 이야기 구조에 근거하여 몇 가지 사건들이 연이어 지속되면서 어느 정도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다가 종국에 궁금했던 무엇이 해결이 되며 안도감을 주거나 비극적 종말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각기 다른 감동을 주는 그런 골격을 갖고 있다. 이 서사구조가 잘 짜여져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영화가 재미있다고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자꾸 몸을 비꼬고 다른 생각을 하다가 한숨 쉬며 극장을 나오게 된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특히 막대한 자본을 투여한 블록버스터들은 하나같이 바로 탄탄하지 못한 내러티브가 가장 큰 약점으로 꼽혔다. 영화는 광고가 아니어서 아무리 아름답고 황홀한 스펙터클을 제공하더라도 90분에서 120분 가량의 지속시간을 이어주는 이야기의 고리가 약하면 시각적인 볼거리는 공허한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국문학자와 한국영화의 취약한 내러티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한국소설이 서구 혹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문학과 비교해볼 때 영화와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들었다. 고대소설부터 현대소설까지 상대적으로 한국의 서사구조는 우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외국의 대다수 이야기구조와 비교해서 허약하기 그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답을 접하지 못했지만 <청풍명월>은 또 한번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회한과 복수가 난무하는 무협영화

<청풍명월>의 경관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햇살이 곧게 치솟은 대나무 사이 사이를 휘감은 숲에서 주인공 규엽(조재현)과 지환(최민수)의 대면이 그렇고, 인조반정이후 태평성대를 꿈꾸며 건립된 무관양성소 “청풍명월”의 훈련지이며 지환과 규협이 처음 만나 우정을 이룬 장소들도 비할데 없이 멋지다. 또한 우리나라에 저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영화에서는 처음 보는 장대한 경관도 수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경치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정치 세력들의 이권 다툼에 우정을 나누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어하던 두 친구가 적이 되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된다는 비극이다. 광고나 예고편을 통해 알고 있는 단순한 요약 이외에는 그다지 색다른 반전이나 중복으로 겹쳐지는 얘기도 없다.

좀더 덧붙여지는 사건들은 규엽이 친구에게만 칼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같은’ 스승(청풍명월의 부대장 김인)의 목까지 베어야 한다는 것이고, 바로 그 복수를 위해 자객이 된 김인의 딸, 시영(김보경)이 등장하는 것 정도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평화로운 기억은 단지 스치기만 할 뿐 지환과 규엽의 현실은 살인을 저지르거나 살인을 당해야 하는 비극적인 운명이다. 지환은 자객이 되어 밤에만 귀신같이 나타나 소름끼치는 살인극을 저지르고, 인간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규엽은 합법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을 벤다.

<청풍명월>은 무협영화라는 장르를 지향하지만 여기에는 무림의 고수 혹은 영웅이 없다. 두 주인공은 다 비범한 무예실력이 있지만 그 무예를 연마해서 예술의 경지에 오르려고 하는 무협의 핵심사상을 알 겨를이 없다. 이들에게는 시대와 권력에 대한 회한과 복수만이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은 이름없는 자객으로, 한 사람은 단지 인간백정이라는 천한 신분으로 단 한번도 세간에 칭송을 받지도 않는다. 이들은 실력으로 평가 받는 무협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신분세습이 뚜렷했던 조선에서 천대 받는 힘없는 무관이었을 따름이다.

지환과 규엽의 우정도 그런 힘없는 무관과 자객의 한계를 안고 있다. 남성들의 우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초월하는 ‘의리’다. 한국의 남성들이 주윤발이 등장하는 오우삼의 홍콩영화에 열광했던 것은 자신이 어떤 고초를 당하던지 친구를 위해 희생하고 우정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 있는 남성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풍명월>은 규엽이 자신의 부대원을 위해(친구를 위해 혹은 스승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때부터 이미 주윤발식 우정과는 멀어졌다. 그래서 마지막 규엽이 지환과의 우정을 위해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라고 하는 행동이 감동적인 비장함과는 거리가 먼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슴아픈 사랑이야기는 맛보기

또한 부수적인 요소로 등장하는 지환과 시영의 애정관계도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지환이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 시영이 지환을 살려내고 둘은 같이 살면서 자객이 된다. 시영이 잡히자 지환은 험난한 고비를 넘기며 시영을 구해낸다. 지환은 마침내 임금을 살해하기 위해 시영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혼자 어가행렬대에 잡입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시영이 나타나고, 그녀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환이 거사를 미루게 만들고 시영을 돕다가 그마저 위험에 처한다. 둘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무협영화의 애정관계와 비슷하지만 가슴아픈 사랑은 우정에 밀려 단 한번도 스크린을 장악하지 못한다.

시영은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일련의 살인사건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물이지만 그녀는 남성들의 우정에 밀려 중심에 서지 못한다. 시영이 지엽적으로 그려지는 게 안타까운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청풍명월>에 등장하는 성별이 다른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시대가 그랬고 더구나 남성들의 세계에 등장하는 여성이란 기녀밖에 없는 곳에 인간적인 여성은 시영 뿐이다. 그녀는 <친구>에서 맡은 역할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거대하고 대단한 남성들의 우정 속에서 극히 소소한 존재로 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에서는 이야기의 전개 상으로 그녀가 중심인물이 아닐 수 밖에 없는 이유라도 제공했지만 <청풍명월>은 그녀가 중요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두리로 내몰린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청풍명월>은 100% 남성들을 위한 영화이다. 여성들의 우정을 중심에 놓고 있지만 남성을 변방으로 내몰지 않는 <싱글즈>도 있는데 <청풍명월>이 얼마나 많은 관객몰이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시네마 단신
   


장쯔이, <조폭 마누라2>에서 신은경과 한판 승부

장이모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1999)로 데뷔, <와호장룡>(2000), <영웅>(2002)등에 출연,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은 중국 배우 장쯔이가 10일 <조폭마누라 2- 돌아온 전설> 에 노개런티 카메오로 출연했다. 장쯔이는 1편 마지막 장면에 최민수가 모습을 비췄던 것처럼 2편의 라스트 신에서 멋진 와이어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광주국제 영화제, 미ㆍ일 걸작 상영

8월 22∼31일 개최 예정인 제3회 광주국제영화제(www.giff.or.kr)는 특별섹션 프로그램으로 존 포드 감독 회고전, 일본 액션영화 걸작전, 조앙 세자르 몬테이로 감독 추도전을 마련키로 했다. '존 포드, 서부영화의 전설'이란 이름의 회고전에는 <역마차>(1939년), <황야의 결투>(46년), <수색자>(56년),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62년)를 포함 12편이 상영된다. 일본 액션영화 걸작선'에서는 60∼70년대 일본 액션영화의 양대 제작사인 닛카쓰(日活)와 도에이(東映)의 영화 10편이 소개된다.

채윤정 영화평론가


채윤정 영화평론가 blauth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