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냄새 '물씬' 만개한 할리우드 키드

[스타탐구] 최민식

사람냄새 '물씬' 만개한 할리우드 키드


"연기는 자기와의 전쟁, 배우 그만두면 중국집 할 것"

때로는 사랑한다는 말보다 믿는다는 말이 가슴 속에 더 와 닿는다. 믿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지만 믿으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한국 영화배우 중에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음을 다해 말하면 모든 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있다. 최민식.

무대와 스크린에서 뿐만 아니라 스크린 쿼터 사수집회, 동강 살리기 운동, 심지어 오렌지 주스 광고까지 그가 이거라면 이것이 된다. 스스로 믿는 것에 대해 모두가 믿게 만드는 마술같은 힘! 사람의 탈을 쓴 배우, 최민식이기에 가능하다.


주름도 연기가 되는 배우

최민식의 얼굴엔 ‘세월’이 있다. 그 ‘세월’은 단순한 늙음의 의미가 아니라 여유와 관록을 말한다. 나이에 비해 유난히 주름이 많은 그의 얼굴도 이런 이미지에 한 몫 한다.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은 그를 두고 “주름도 연기가 되는 배우”라고 말한다. 매끈한 꽃미남은 아니지만 알랭 드롱처럼 주름이 깊은 그의 얼굴은 연기의 감정선을 풍부하게 한다. “왼쪽 눈 밑 주름은 고등학교 때 깡패들과 싸워서 생긴 거고, 미간의 주름은 눈이 나빠 자주 찡그리다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버렸네요.”

배우가 될 생각은 중학교 때부터 가졌다. 관람료가 서울의 절반인 의정부까지 원정을 가 영화를 봤는데 지금도 의정부행 13번 좌석버스는 잊지 못한다. 지금 모습인 177㎝ 75㎏이 중학교 2학년인 당시 체격이었으니 ‘미성년자 관람 불가’라는 표시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때 본 영화가 <타워링> <스타탄생>. 영화를 보면 볼수록 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은 간절해졌고 틈만 나면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연극과 영화를 봤다. 축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평소엔 말이 없다가도 일단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었는데 최민식이 이 다음에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하자 아무 말없이 오른쪽 발길질을 날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은 큰 형(찬식)도 화가가 되겠다고 집안에 선포를 한 날이었다. “한 놈은 환쟁이, 환 놈은 딴따라. 잘들 한다.”

대학은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갔다. 집에서는 등록금만 받아쓰고 장충동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집보다는 소극장에 칫솔이며 옷가지를 갖다 놓고 살다시피 했다. 일년 뒤 배우 한석규가 후배로 들어왔고 족발집에서 술잔도 꽤 기울였다. 그렇게 연극판을 떠돌고 있는데 KBS 작가라는 사람한테 연락이 왔다. 당시 최민식이 열연했던 연극 <에쿠우스>를 유심히 봤는데 <야망의 세월>이라는 드라마에 ‘꾸숑’역을 맡기고 싶다고.

‘꾸숑’으로 하루 아침에 벼락스타가 된 그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차인표 같은 시절’을 보내게 된다. 연극판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출연료에 어깨에 힘들어가게 하는 눈부신 인기는 거부하기 힘든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이어 <정든 님> <일월> 등에 출연했지만 인기는 추락했다.

유명에서 무명스타로 전락하면서 인기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망가지나 싶었는데 ‘지옥에서의 한철’을 정리하게 만든 드라마를 만난다. <서울의 달>. 한석규와 함께 출연한 드라마 였는데 시골청년 ‘춘섭’역으로 인기의 급회오리를 또 다시 탔다. 실제 시골청년보다 더 순박한 그의 곰살맞은 연기는 진한 장맛같은 아련함을 줬다. 비로소 연기자 최민식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들린 연기

<서울의 달>이후 여의도에서 충무로로 운신의 폭을 옮기며 그의 인기는 탄탄대로를 달린다. 출세작이자 한국영화 전대미문의 히트작인 <쉬리>에서의 ‘박무영’ 연기는 “조국통일 만세!”라는 단순 과격한 구호만큼 관객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줬다.

자기가 길러낸 인간 병기 이방희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번민과 숙적 유중원을 겨눈 총기에 서린 고독한 인간의 질투는 ‘최민식’이기에 가능한 연기였다. “전 목숨 걸고 배우하는 사람이에요. 경구랑 강호랑도 매번 다짐해요. 나이 먹어서도 폼나게 연기하자고요. 저번에 TV에서 봤는데 한 변호사가 취미로 배우한다고 그러대요. 솔직히 한 대 날리고 싶었죠. 쳇.”

임권택을 만나 <장승업>을 찍으면서도 그의 연기 투혼은 계속된다. 술과 여자에 찌든 조선시대 화가 오원 장승업 연기는 심적, 육체적 부담감을 안겨줬다. 생전 관심없던 동양화를 하나 하나 배우고 집 근처 불곡산을 오르내리며 심신을 달랬다. 그 좋아하는 음주가무도 촬영 일정상 모두 멀리하고 대신 영화 속 막걸리인 쌀 음료 ‘아침햇살’만 질리도록 마셨다. 좋은 감독과 촬영기사를 만나 영화는 대박이었고 칸 영화제 수상이라는 일대 기록을 낳았다.

“배우는 무당이라고 생각해요. 신이 씌어야만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죠. 장승업의 예술혼을 실체화하는 것이 저의 몫이었어요. 아직도 당시 연기를 생각하면 살 떨리는 일이지만 정말 원없이 깨지고 망가지면서 찍은 영화였습니다.”

계산할 줄 모르고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 속 장승업과 얼핏 닮기도 했다. 그려주기 싫은 사람한테는 억만금을 준대도 그림 한점 안 주고,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은 기생의 치마폭에는 하나 가득 매화를 쳐주는 장승업처럼 그는 막말로 “꼴려야만” 작품한다고 한다.

최근엔 한 모텔방에 갇혀 하루 세끼 군만두만 먹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 출연중인데 15년 동안 이유도 모른 채 감금돼 군만두만 먹고 살아가는 남자를 연기하고 있다.

원래 중국 음식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먹는데 일주일 째 군만두만 먹어 입안이 다 헐 지경이다. 상대역은 유지태로 약간의 설정을 제외하곤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올 하반기 기대작이다. 얼마 전엔 한국을 방문한 웨슬리 스나입스가 촬영장을 찾아와 최민식과 영화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카메라 앞에 서면 깊은 외로움

“솔직히 남의 인생을 표현한다는 게 참 벅찹니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서면 외로워요. 처절한 자기와의 경쟁이거든요. 늘 다짐해요. 연기가 싫어지면, 사람들이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면 그만 두자고요. 중국집이나 할려고요. 아내한테도 늘 말해둬요. 나중에 카운터에 앉을 각오하고 있으라고.(웃음)”

인기의 오르내림을 경험해서인지 그의 연기는 인생이 뭔지를, 사람이 뭔지를 겸손하게 내비치고 있다. 두둑한 배짱으로 한국영화의 한 축을 짊어지고 있는 최민식. 그가 있어 우리 영화의 미래는 밝다.

김미영 자유기고가


김미영 자유기고가 minju@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