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1945년 8월9일 유감

8월 9일 상오 11시 2분. 일본 규수 나가사키 시의 종들이 울었다. 58년전 1945년 같은 시각 두번째 원자폭탄이 7만여명(당시 인구 28만 5천명)의 생명을 앗아 간 것을 기리는 조종(弔種)이었다. 나가사끼 이또 잇참 시장은 수천명 청중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국제 핵무장 금지, 확산 방지, 핵무기 사용 금지는 붕괴 직전에 있다. 인디어, 파키스탄은 핵 실험을 했다.

북한은 그 문턱에 있다. 미국은 4월에는 지하를 뚫고 들어가 파괴 하는 소형 핵탄을 만들겠다고 공업했다”며 미국이 제시한 핵무기 재고려 정책을 비난했다.

이에 앞서 6일 히로시마 아키바 타다도시 시장은 평화공원에 모인 수만 청중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을 명백히 현실을 말해준다. “전쟁이 평화이며 그것은 진실이다고 외치는 것이다.”

아키바 시장은 미국이 핵무기를 ‘신(God)’처럼 섬기고 있다”고 비난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에 북한은 6자회담 참가를 공식확인 했고 나가사키에 떨어진 9일에는 8월말에 베이징에서 개최됨은 방북한 왕이 중국 외무부 부부장에게 확인했다.

일본의 두 시장과 북한은 미국에 ‘신’처럼 만드는 핵무기 정책’에 동조하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1949년 5월, 히로히토 일왕은 점차로 행정권을 이양하는 맥아더 사령부의 정책의 반영으로 ‘신’에서 인간으로써의 천황 이미지를 심기위해 규수를 방문했다. 나가사키에 온 그는 ‘나가사끼의 종’을 쓴후 피폭자의 마지막은 맞고 있는 의사며 교수인 다카시 나가이를 문병했다.

다카시는 그 자신 피폭자이면서 수많은 확자를 치료했고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자탄이 갖는 의미를 책으로 내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다. ‘나가사키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신에게 바쳐진 순수한 속죄양이다’고 ‘종’에서 썼고 많은 독자들이 동감했다.

그러나 미국의 갈 알페로비치(‘원자폭탄 투하 결정 이유’의 저자ㆍ메릴랜드 대 연구 교수)등은 트루먼의 투하 결정을 냉전의 수정주의 시각에서 봤다. 그는 “일본이 항복 할 것을 알고도 트루먼과 그때 국무장관 바이언스가 소련의 일본 분점을 막기 위해 조기 투하를 결정 했다”고 분석했다.

이런 주장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했다. 그러나 일본의 진보적 역사학자인 아시다 사다오(도시사 대교수), 일본에서 히로히토를 연구한 하워드 빅스(‘2001년 풀리쳐 역사 부문 수상자ㆍ‘히로히토와 근대 일본 만들기’의 저자)는 “원자 폭탄은 일본에 준 ‘신’의 선물이다”는 분석을 내 놓았다.

아사다 교수는 1945년 6월 오키나와가 함락되고 난후 열린 전시 내각에서 3명은 전쟁 계속, 3명은 조건부 항복을 원했고 히로히토는 중립적이었다고 보았다. 조건 있는 항복을 요구한 트루먼 등 3거두의 포츠담 선언(7월), 8월 6일 히로시아 원폭투하 후에도 강경파는 전쟁 계속을 주장했다.

히로히토의 최측근 배신인 기도 고이치는 “원자 폭탄에 의해서 전쟁은 끝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요나이 해군 장관은 “그 폭탄은 ‘하늘로부터의 선물’이었다”며 “교착된 정치적 상황을 풀어주는 ‘핵심’이었다”고 돌이켰다. 포츠담에 있던 트루먼은 7월 16일 원폭 실험 성공 소식을 듣고 처칠과 상의 후에 스탈린에게 이사실을 알렸다. 7월 25일자 일기에 그는 적었다.

”지금부터 8월 10일 사이 이 폭탄(역사상 가장 가공할)을 일본에 투하한다. 비록 일본인이 야만스럽고, 무모하고, 잔인하고 광적이라도 이 폭탄을 도쿄에는 투하하지 않는다. 군사적 목적물에만 사용하고 ‘항복해 목숨을 구하라’”고 사전 경고 한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이 무기를 갖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나는 이 폭탄을 유용하게 쓸 것이다.”

원폭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 1952년 수소탄을 만든 에드워드 텔러(헝가리 출신ㆍ물리학자ㆍ핵융합의 이론가ㆍ2001년 ‘회고록:20세기 정치와 과학의 여로’의 저자)는 나가사키 투하 후 그의 동료 페르미(1931년 노벨 물리학 수상ㆍ이태리인ㆍ원자폭탄 핵분열의 이론가)의 처 로라에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투하 한다면 나는 이 연구소(로스 아모스)를 떠나겠다. 이 폭탄이 도쿄만 근처에서 실험적으로 폭발되었을 뿐, 이토록 끔찍하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 그 가공성을 알리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할 것이다.”

어떻든 1945년 8월 9일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날이란 점에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날 이후 세계에서 핵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핵이 강대국간 ‘공포의 균형’(balance of power)이든, 핵 정책이 ‘신탁’을 받은 것이든, 8?9일이란 여하한 의미에서건 핵폭탄이 실전에 사용되지 말아야 함을 되새기게 하는 날이다.

박용배 언론인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