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허를 직시하라"

[석학에게 듣는다] 이기상 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무·공·허를 직시하라"


선생의 표현을 빌면, 녹차를 보고 지리산의 구름과 차나무를 키워낸 할머니의 거친 손까지 읽어 내자는 철학이다. 그는 '하이데거의 경우, 국내에는 재대로 소개되지 못 했던 때였다"며 "그를 위해서는 독일어로 철학하고 사유할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유럽에서 13년 있었지만 선생이 아는 데라곤 독일땅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그는 하이데거에 집착했다. 하이데거란 광대한 숲을 미련스레 헤치고 나온 것이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무턱대고 갖다 대기 때문에 멀쩡한 한국 아이들까지 환자시 되잖아요? 푸코 같은 철학자가 뒤늦게야 깨달았듯, 유럽과 아시아는 각각 성(性)의 역사가 달라요.”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서만 가능한 프로이트 이론 같은 데서부터 가장 동양적인 사상서까지, 선생에게는 모두 하나다. 마치 모시 한복을 입고 하이데거를 논하는 것처럼.

서재와 응접실이 책으로 둘러 싸여 있는 자택 풍경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바다. 바로 그 책더미에서 철학자 이기상(57ㆍ외국어대 철학과) 선생의 시원한 옥색 한복 차림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데 늘상 입는다는 한복 차림도 그러려니와, 꽂힌 책들을 둘러 봐도 주인의 정체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관류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바로 선생의 현재다.


국내 최고의 하이데거 연구가

선생은 우선, 국내 최고의 하이데거 연구가다. 동시에 ‘우리사상연구소’ 회장이고, 또 ‘우리말로 학문하기 회장’이면서, 인터넷상으로 철학 관련 도메인을 운영하는 시삽이다. 가장 한국적인 언어로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와 실재를 온-오프 라인으로 탐구해 가는 철학자다.

외국어대 캠퍼스가 있는 이문동과 용인의 중간께가 될 잠실에 집을 두고 두 곳을 오가는 현재 상황이 선생의 독특한 입지를 상징한다. 그는 ‘사이’를 중시한다. 동양과 서양의 사이, 철학과 실재의 사이…. 존재와 존재의 사이, 의미의 사이….

‘사이’란 편집인으로 있는 잡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잡지는 그의 독특한 철학관과 뜻을 함께 하는 타분야 학자들이 모여 동양도 서양도 아닌, 우리 말로 학문하기란 어떤 것인지 연구하고 성과를 발표한다. 선생은 첫호 권두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서양의 기술 문명과 경제 중심의 세계관이 퍼뜨리고 있는 지구 위의 재앙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중략)…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화의 추세에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이 땅의 한국인은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한다”.

논지가 명료하다. 그 같은 문제 의식은 선생에게는 서양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한국에서 철학한다는 것의 의미를 파 들어 가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철학계 내부에서 떠돌던 농담 하나는 기존 철학 방법론에 대한 자조라는 반성에서 출발한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계에서 슬며시 유포되는 ‘서양 철학은 수입상, 동양 철학은 고물상’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동구권이 붕괴되고,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되면서 서구 제일주의는 근본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3년, 선생이 ‘우리 사상 연구소’를 창립한 것은 철학적 주체 의식의 발로였다.


서구적 물질문명의 허구 지적

그의 우리 길 찾기 작업의 연원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 연구에서 비롯한다. 1972년 벨기에 루벤대학교 신학대학坪?마치고, 이어 1975년부터 뮌헨 예수회대 철학 대학에서 10년 공부를 다 하고 나니 그는 하이데거로 본토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됐다.

하이데거는 세계를 이성과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만 바라 본 결과, 파괴로 종결되고 만 서구의 시각을 비판한 철학자다. “종교적ㆍ예술적ㆍ시적(詩的) 사유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웠죠.” 무(無)ㆍ공(空)ㆍ허(虛)를 배제한 서양 철학의 맹점을 직시하고, 보이는 것의 뒤에 숨은 의미를 읽어 내자는 철학이다. 서구적 물질 문명이 주도하는 근대성의 맹점을 비판한 하이데거의 생각은 사르트르 등 직계 제자를 거쳐 푸코ㆍ데리다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들보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같은 믿음으로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등 하이데거 연구서는 물론, ‘존재와 시간’ 등 하이데거의 주저가 그의 연구실에서 속속 배태됐다. 선생의 표현을 빌면, 녹차를 보고 지리산의 구름과 차나무를 키워낸 할머니의 거친 손까지 읽어 내자는 철학이다.

그는 “하이데거의 경우,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 했던 때였다”며 “그를 위해서는 독일어로 철학하고 사유할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유럽에서 13년 있었지만 선생이 아는 데라곤 독일땅을 벗어나지 못 할 정도로 그는 하이데거에 집착했다. 하이데거란 광대한 숲을 미련스레 해치고 나온 것이다.

1984년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하고 외국어대 철학과 교수직으로 귀국했을 대, 그를 제일 힘들게 했던 것은 뜻밖에도 한국어로 강의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분야의 철학책은 물론, 다른 분야의 철학도 거의 번역돼 있지 않았다. 특히나 정교한 하이데거 철학을 두루뭉술하게 강의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매 강의마다, 강의 원고를 미리 준비해 갔다. 그렇게 하니 한 학기당 A4 용지로 70여매 정도의 뭉치가 모였다. 포켓 북 한 개 정도의 글이 학기마다 쌓인 셈이다.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2001ㆍ까치刊) 등의 책이 바로 한 학기 강의록이다.

그러다 보니 예기치 못한 수확이 딸려 들어 왔다. 독어 번역에서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일어책은 전혀 참고하지 않았던 터여서 인문ㆍ사회과학 분야의 역서가 그랬듯 중역(重譯)의 오류란 남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었다.

‘피투성(被投性ㆍGeworfenheit)은 ‘내던져져 있음’으로, ‘용재성(用在性ㆍZuhandenheit)은 ‘손안에 있음’으로, ‘안전성(眼全性ㆍVorhandenheit)’은 ‘눈앞에 있음’ 등으로 기존 관행을 혁파해 갔다.

현재 3권까지 간행돼 있는 ‘우리말 철학 사전’은 이 교수 특유의 철학 하기 방식이 선명히 드러나 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그 같은 방식으로 단행본 25권, 논문 60여편을 남겼다.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남이 못 알아 듣는 얘기를 해야만 하는 현학주의, 먹물 근성은 이제 그만 두자는 거죠.” 지식 사회의 위선은 선생이 번역한 문장을 자기 논문에 그대로 옮겨 놓고 다시 원서를 뒤져 원문을 붙여 논문을 쓰는 세태에서 심심찮게 드러난다. 이렇듯 국내 학계가 무사안일주의 속에서 쳇바퀴 도는 것은 학벌주의가 낳은 끼리끼리 봐주기 탓이라고 선생은 지적했다.


하이데거 지론의 한국화

선생의 한복 차림은 멋의 차원이 아니다. 1989년 이래 진지하게 탐구해 오고 있는 한국 철학이 외화된 것이다. 학문적 자의식은 하이데거를 이어 받은 면이 크다. 즉, 독일 철학자들이 철학을 논할 때는 독어가 아닌 라틴어를 쓰는 것에 반해 일상 독일어로 철학해야 함을 실천해 보인 하이데거의 방법론을 이어 받은 것이다.

1989년은 다석 유영모(1890~1981)를 알게 된 때다. 동서 철학을 아우르는 통합적 사유가 세계 철학계의 새 화두로 떠오르던 무렵 만난 거대한 그릇이다. 신학자 안병무의 스승인 함석헌을 가르친 철학자이나, 은둔적 생활 때문에 세상이 알아차리지 못 한 인물이다.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좌선 명상으로 동서양 경전에 통달한 영성가이다. 저녁 석(夕)자만 세 개 모여 이뤄진 호는 저녁에 한끼만 먹는다는 금욕적 삶을 그대로 담고 있다.

다석은 오직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며 삶과 죽음의 사이에 있는 인간은 현세의 아집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했다. 다석의 사상이 하이데거의 ‘esgibtsein론(선물로 주어진 존재로서의 인간론)’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선생은 사상적 연장선에 있던 다석의 삶과 앎의 내용을 우리 시대에 불러 낸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 삶과 죽음의 사이에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다석의 가르침을 그는 2002년 7월 반년간지 ‘사이’를 창간 하는 것으로 답했다.

책은 새로운 철학으로 가득하다. 부산대 자연대 김향묵 교수가 쓴 ‘공룡 이름 우리말로 바꾸기’ 같은 것은 그대로 피부에 와 닿는다. 원래의 라틴어 발음은 ‘펜타케라톱스(pentaceratops)’를 영어권에서는 ‘펜터세라톱스’라 하고 한자로는 ‘오각룡(五角龍)이라 쓰듯, 이제 한국학계도 ‘닷뿔룡’이라 부르자는 제안이다.

또 종두룡(腫頭龍)‘이라 번역돼 온 ‘패키세팔로서러스(pachycephalosaurus)’ 같은 경우는 ‘박치기룡’이라 옮기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일상 독일어로 철학을 하자는 하이데거의 지론이 완전히 한국화한 셈이다.

창간호 권두사에서 그는 “서양의 기술 문명과 경제 중심의 세계관이 퍼뜨리고 있는 지구위의 재앙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며 “사람과 자연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문화 사이가 망가져 가고 있는 이 위기의 세계화 시대에 ‘사이’를 밝힐 수 있는 희망의 불길을 지피고자 한다”고 밝혔다.


동서양 학문의 상생

그는 서양으로 들어가 동양에서 나왔다. 이 교수에게 그것은 당연한 행로다. 제국주의적 오만함으로 뭉쳐 있던 서구의 사유하기가 동양의 생각하기 방식에 눈뜨기 전부터 선생은 그 길을 자신의 방식으로 찾아 갔다. 그리고 상생의 길로 걸어 들어 가고 있다.

그것은 학문적 자의식이다. 일찍이 르네상스인들이 ‘비틀거리더라도 너의 두 다리로 서서 너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며 소리 높였던 것처럼.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적 사유의 첫발을 내디뎠던 르네상스 시대를 선도했던 것처럼, 그와 노동은(중앙대 국악), 백종현(서울대 철학), 최상진(중앙대 심리학) 등 34명의 편집위원들은 우리말로 학문한다는 것의 의미를 깨우치고 있다.

8월 12일 설악산 백담사의 만해 기념 박물관에서 가질 강의, ‘세계화와 동아시아의 가치’가 추구하는 바가 다름 아닌 상생의 세계다. ‘나눔과 섬김의 살림살이’라는 부제를 단 그 강연이 펼쳐질 날은 만해 축전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지금 선생의 책상에는 내년 중 까치 출판사에서 펴낼 하이데거의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의 번역 원고가 놓여 있다. 이에 앞서 9월말 지식산업사에서 나올 예정인 ‘다석과 함께 하는 우리말 철학’은 지금 교정 작업중이다. 교황을 불변의 정점으로 하는 종교적 세계관으로 보자면 르네상스 철학은 불온의 극을 달리는 말이지만, 속박을 깨고 재생의 길로 나아가려 인간들에게는 복음이었다.

우리 시대, 이기상 선생은 하나의 복음서를 서술해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장병욱 차장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