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 대법관 후임인사 놓고 법조계 술렁, 후보 6명 모두 진보색채

보수의성에 진보 입성할까

사성 대법관 후임인사 놓고 법조계 술렁, 후보 6명 모두 진보색채

‘대법관이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은? 튀는 판결을 많이 해야 한다.’

요즘 판사들 사이에 회자되는 우스개다. 시민 단체가 9월 퇴임하는 서 성 대법관 후임으로 6명의 후보를 공개 추천한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서울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몹시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지들이 법관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 고작 판결 몇 개, 언행 몇 마디를 두고 판사의 자질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 말이야.”

대법관 인사를 앞두고 서초동 법조타운이 시끄럽다. 장관 인사도, 혹은 대기업 임원 인사도 아닌 대법관 인사를 두고 이렇게 왈가왈부했던 적은 없었다. 3권 분립의 보호막 안에서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제청한 인사를 대통령이 임명하는 순서로 조용히 진행되는 것이 관례였다. 후보군도 그리 많지 않았다. 직전 대법관 임명자의 1~2회 후배 중 ‘로열 코스’를 밟아온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니까.

지난 3월 ‘법관 인사제도 개선위원회’가 구성되고, 이번 대법관 인사부터 ‘대법관 제청 자문위원회’를 가동키로 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대법원 스스로 대법관 인선 과정에서의 검증 필요성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시민단체, 변호사단체 등이 잇따라 대법관 후보를 공개적으로 추천해 파장을 몰고 온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이었다.


진보 일색 추천 후보들

최병모 변호사, 박원순 변호사, 이홍훈 법원도서관장, 박시환 서울지법 부장판사, 전효숙 서울고법 부장판사,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 시민 단체와 교수,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시민추천위원회가 추천한 대법관 후보 6명의 면면은 진보 일색이다. 대법원의 보수성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재야 인사로 추천된 최병모 변호사는 진보적 변호사 단체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현직 회장. 옷 로비 사건의 특별검사를 지냈고 새 정부 총리직에서부터 국정원장, 법무부장관 후보 등에 끊임없이 거론됐다. ‘노변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변호사 모임)’의 회원이기도 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국내 대표 시민 단체인 참여연대에서 오랫동안 사무처장을 맡아 온 인물. 여야 정치인들에게는 ‘쓴 소리 잘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2000년 전국을 낙선 운동 열풍으로 몰아 넣었던 총선 시민연대의 상임공동집행위원장, 같은 해 시민운동가가 뽑은 ‘지난 10년간 가장 훌륭한 시민운동가’ 선정, 미국 경제전문지 ‘비즈니스 위크’가 선정한 ‘아사아의 스타 50인’ 선정 등 재야에서 쌓아온 그의 명성은 화려하다.

이홍훈 법원도서관장은 법원 내부에서 ‘소신 판사’의 이미지를 쌓아 왔다. 최근 주목할 만한 판결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현수막 판결’. 지난해 10월 서울고법 특별4부장이던 그는 1심 판결을 뒤집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는 등의 현수막을 내걸지 못하게 한 지자체의 행위는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헌법을 포함한 법률의 재ㆍ개정 및 폐지에 관해 자기의 의견을 표시하는 행위는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해석이었다.

박시환 부장판사는 ‘진보 법관’의 대명사다. 서슬 퍼렇던 5공 시절 반정부 가두 시위로 즉심에 넘겨진 대학생 11명에게 모두 무죄 판결을 내려 인천지법에서 영월지원으로 좌천됨으로써 ‘법관 인사 파동’의 주인공이 됐고, YS 정부 출범 직후인 93년에는 서울민사지법 단독 판사들의 ‘사법부 개혁요구’ 성명을 주도했다.

올 5월에도 문흥수 부장판사 등과 함께 법관 26명의 연명을 받아 법관 인사제도를 비롯한 사법부 개혁 방안을 마련해 대법원장에게 건의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현행 병역법 규정에 대한 위헌 심판 제청, 새로운 증거 없는 검찰의 영장 재청구에 대한 각하 결정,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피고인에 대한 직권 석방 등 ‘문제의 판결’도 숱하게 양산해 왔다.

이런 이력 탓에 박 부장판사는 최 변호사와 함께 대한변협이 회원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1,2위를 차지해 대법관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전효숙, 김영란 부장판사가 후보군에 거론된 것은 사법 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 탄생을 위한 사전 포석의 성격이 짙다. 현재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하는 몇 안되는 여성 법조인(총 4명)인 이들은 최초의 고등법원 형사부 여자 부장판사(전효숙), 최초 여성 지역 선관위원장(김영란) 등 여성 법관의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실명 추천 과연 정당한가

사법부의 불만은 후보 추천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실명으로 한 데 있다. 대법원 공보관 손지호 판사는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다”고 운을 뗀 뒤 대법원의 입장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요약하자면, “일각의 오해처럼 시민단체 추천 운동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특정인을 공개 추천한다면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압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인맥, 혈연, 학연 등으로 얽혀 있는 것이 현실인데 모든 이익집단이 저마다 특정인을 후보로 추천하고 나선다면 국민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있다”고도 우려했다.

사법부의 보수색에 길들여진 대다수 판사들도 이런 입장에 동조한다. 특히 추천 후보들의 진보 성향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눈치다. 법원장 승진 문턱에 있는 한 법관의 불만은 아주 노골적이다. “고위 법관들이 모두 눈치보기 판결을 통해 현재의 자리까지 왔다는 일각의 주장에는 정말 모멸감을 느낀다. 판사의 중요 덕목 중 하나가 사회적 중립이다. 만약 노동계 편향의 판사가 대법관이 된다면 재계에서 그 판결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기수 파괴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해 있다. 현재 대법원장을 포함한 14명의 대법관 중 말석 대법관의 사시 기수는 10회. 6명의 추천 후보 중 가장 기수가 빠른 이홍훈 법원도서관장이 사시 14회인 것을 비롯해 김영란(20회) 박시환(21회) 박원순(22회) 등 무려 10회 이상의 기수를 건너 뛴 이들이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다.

서울지법 한 판사는 “서열 파괴가 사회적 대세라지만 사법부는 좀 달라야 한다”며 “3심 구조의 사법부 시스템에서 후배의 파기 환송심에 수긍할 법관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앞서 대한변협의 후보 추천 과정의 안일함도 도마 위에 오르내린다. 변협 소속 변호사가 5,000명이 넘지만 실제 이번 대법관 추천 설문 조사에 응한 변호사는 10%에 못 미치는 391명에 불과했다는 것. 게다가 추천 인물이 얻은 득표수도 고작 10~20표 남짓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변화는 이제부터다

시민단체측도 실명 공개가 낳을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다. “새로 만든 내규에 비공개 추천을 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는 사실을 대법원측이 뒤늦게 밝혔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공개 추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식을 비판하다 대법관 추천 운동의 본질까지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다. 시민추천위원회 멤버인 박연철 변호사는 “후보 추천 방식은 점점 더 성실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며 “대법관 인선에 독단을 배제하고 다양성을 보장함으로써 대법원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되찾는데 일조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이해해 달라”고 했다.

물론 시민단체 등의 추천이 이번 대법관 인사에 반영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진보 성향 법관의 일각에서는 “아직은 시기 상조”라며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번 시도는 한 차례의 해프닝에 그치고 마는 것일까. 박 변호사는 “향후 6년(대법관 임기) 내 대법원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 단초로 이해해 달라”며 주문, 그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이영태기자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