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탠다드차터드 한미은행 지분 인수, 막강해진 외국자본

시중은행, 토종 없다

시탠다드차터드 한미은행 지분 인수, 막강해진 외국자본

“한미은행은 우수한 경영 실적, 탁월한 경영진, 외국인 소유권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는 은행이다. 한미은행 지분 매입으로 한국 시장에 또 하나의 거점을 마련하게 됐다.” (멀빈 데이비스 스탠다드차터드 은행 대표)

8월6일 영국계 스탠다드차터드 은행(STB)은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이 보유했던 한미은행 주식 9.76% (1,982만주)를 1억5,400만 달러(1,800억원 가량)에 매입했다. 금융계에는 두 가지 충격을 던졌다. 은행업 진출을 호시탐탐 노려왔던 삼성그룹이 일단 발을 뺐다는 것이 하나였고, 선진 금융기관을 자처하는 정통 외국 은행이 국내 은행의 대주주로 등장했다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지금까지 국내 시중은행의 외국계 대주주는 크게 두 부류였다. 단기 투자 차익을 노리는 투자 펀드이거나, 방카슈랑스 시행을 앞두고 국내 은행을 활용해 보려는 보험 그룹이거나. 외환은행의 1대 주주인 독일 코메르츠방크 만이 STB와 같은 정통 은행이지만, 대주주로서의 최소한의 간여만 했을 뿐 국내 영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터였다.


예사롭지 않은 STB 행보

STB는 전 세계 50개국에 500여 개의 지점을 거느린 다국적 금융그룹. 1968년 유럽계 은행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지사를 열고 영업을 개시해 지금까지 줄곧 기업금융 업무만을 해 왔다. 그런 STB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STB측은 최근 금융감독위를 방문해 “한국의 은행업에 관심이 있다. 단순한 주가 차익을 목적으로 한미은행 지분을 인수한 것이 아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진다. 게다가 9월 개인대출 업무 개시, 내년 초 강남지점 개설 등 한국의 소매금융 시장 진출에 잔뜩 눈독을 들여온 것을 감안하면 ‘한미은행 지분 9.76%’에 만족하지는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관심의 초점은 STB가 추가 지분 인수를 통해 한미은행의 경영권을 장악할 지 여부다. 금융계에서는 그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보는 분위기다. 한미은행 1대 주주인 칼라일-JP모건 컨소시엄(36.6%)의 지분 매각 제한 기간이 끝나는 올 11월 이후를 겨냥한 포석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간 하나은행, 신한금융지주 등과 합병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칼라일측은 조건만 좋다면 언제든지 지분을 처분할 수 있음을 공공연히 해왔다. 더구나 단기 투자 펀드로서 2000년 11월 주당 6,800원에 지분을 인수한 칼라일로선 1만원을 넘나드는 현재의 주가가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 있을 거라는 분석이다.

금융계에서는 STB측이 추가 지분 인수를 통해 한미은행의 경영권을 장악할 경우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시중은행 한 임원은 “자체적으로 국내에서 소매금융 영업을 하는 씨티은행이나 HSBC와 달리 국내 시중은행의 경영권을 장악해 소매 영업을 한다면 파괴력이 적지 않을 것”이라며 “선진금융기법을 통한 은행 영업은 다른 은행들을 크게 위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벌처펀드가 은행 경영권까지 인수한다

STB와 함께 요즘 은행권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외국 기관은 외환은행 인수를 추진 중인 미국계 론스타 펀드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금융계에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얘기가 나돌았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가장 혜택을 받은 곳은 론스타와 서버러스다.” 서버러스 펀드와 함께 론스타는 98년 무렵 국내에 진출해 많은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쏟아내는 부실 채권을 헐값에 사들여 비싼 가격에 되파는 방식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론스타의 배후에는 국내 권력 실세가 있다”는 음모론이 공공연하게 제기됐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론스타가 지금까지 국내에 투자한 내역을 보면 실로 엄청나다. 자산관리공사(현 KAMCO) 및 예금보험공사 부실 채권 2조5,000억원, 국내 카드채 1조6,000억원, 조흥은행 부실채권 7,600억원, 동양증권 여의도 사옥 650억원, 현대산업개발 ‘I-타워’(현 스타타워) 빌딩 6,800억원 등 지금까지 국내 투자 규모만 10조원에 육박할 정도로 막강한 자본력을 과시한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부실채권 인수, 부동산 매입 등 지금까지 벌처펀드로서의 주요 투자 패턴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지난해 한빛전문여신을 인수하고 서울은행 인수전에 참여했다 쓴 맛을 본 이후 호시탐탐 노려왔던 국내 금융시장 진출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론스타측은 수출입은행 등이 보유하고 있는 구주와 새로 발행하는 신주 인수를 통해 외환은행 지분 51%를 확보하는데 1조~1조3,000억원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 대주주의 효과는?

STB와 론스타의 국내 은행권 진입으로 국내 은행 자본의 국적은 더 화려한(?) 변신을 진행 중이다. 외환 위기를 기점으로 국내 은행권에는 순수 토종 은행이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은 합병 전 ING(구 주택은행), 골드만삭스(구 국민은행)를 대주주로 끌어 들였고, 신한은행은 금융지주회사로의 재편 과정에서 BNP파리바(4%)와 손을 잡았다. 하나(알리안츠) 한미(칼라일) 외환(코메르츠방크) 제일(뉴브리지캐피탈) 등도 은행권 구조조정 과정에서 외국인을 1대 주주로 맞아 들였다.

지금까지 토종 은행으로 남아있는 곳은 정부로부터 공적자금을 지원 받은 우리은행이 유일한 상황. 여기에 우리은행의 외자 유치가 본격화하고 정부의 국민은행 지분(9.7%) 매각이 이뤄진다면 외국 자본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질 수밖에 없다.

금융계 인사들은 향후 국내 은행의 판도는 외국 대주주의 힘의 논리에 의해 상당 부분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점친다. 이미 국민, 주택은행의 합병 과정에서 두 은행의 대주주인 골드만삭스와 ING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뉴브리지캐피탈과 칼라일 등은 은행 경영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이런 변화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외국 대주주로 인해 선진금융기법이 급속히 도입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직 무리다.

하지만 자본력을 확충하고 일반 기업과 마찬가지로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정부의 입김에 따라 비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가 여전히 숱한 은행의 입장에서는 외국인 대주주가 든든한 방패막이 되기도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돈의 성격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외국인 대주주가 들어와 은행을 살리겠다는데 이를 막을 이유가 없다”는 정부의 태도에는 비판도 뒤따른다. 뉴브리지캐피탈, 칼라일 등에 이어 론스타와 같은 투기성 펀드가 은행의 주인이 될 경우 단기 수익에 급급해 자칫 금융 시스템을 위협할 가능성도 다분하기 때문이다.

인천대 이찬근 교수는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캐피탈의 사례에서도 충분한 경험을 해놓고서 또 다시 해외 투기자본에 국내 은행을 넘겨주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결국은 막대한 국부 유출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영태 기자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