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최틀러와 루돌프 헤스

지금 U대회가 열리고 있는 대구는 “조~국 통일”, “우리는 하나다”의 응원속에 들떠 있다.

북한 대학생으로 구성된 응원단은 새로운 응원기구인 진달래색 나팔과 형형색색의 대형꽃술, 배드민턴 라켓, 부채 등을 흔들며 청중을 즐겁게 해 준다. 만약 이들이 달구벌에 오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중앙일보가 8월 19일, 노 대통령 ‘유감’ 표명후 여론조사에 의하면 ‘동의 한다’가 61.8%, ‘동의 않는다’가 38.4%였다. 대구 지역에는 ‘잘했다’가 44%, ‘잘못했다’가 53%였다. 그러나 지난 대선때 노무현 후보 득표율은 18.68%, 이회창 후보는 77.75%였다. 20%미만에서 44%는 대약진이다.

그래서일까, U대회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겠다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결국 “대구로”를 택했다. “대통령 잘못 뽑았다”는 20일의 도산 아카데미 발언을 뒤로 하고서 였다.

이에 대해 북한의 IOC위원인 장웅은 ‘오마이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공동 입장을 싫어 하는 세력이 있다. 그 세력이 아직까지 존재하며 그러한 세력이 엊그제 사건(인공기 소각)을 일으켰다. 이는 화합 통일에 장애가 된다. (중략) 누구나 정견이 있다.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더라도, 예의를 벗어났다. 아주 저열하고 세살배기 아기 같은 문화 수준이다. 상대의 존엄을 지켜 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 존엄 역시 그만큼 훼손된다.” 농구 선수 출신인 그는 영어 공부를 해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통역관이 된 후 1996년에 북한의 IOC 위원이 됐다. 그가 말하는 ‘자기 존엄’이란 무엇일까.

그 답을 히틀러 “대리인”이었던 루돌프 헤스에게서 얻어 보는 것은 어떨까. 1987년 8월 17일, 2차대전의 “가장 귀한 죄수”로 있다가 독일 스판다우 감옥에서 자살한 나치전범이다.

이런 연상(聯想)은 최병렬 대표가 ‘최틀러’(최병렬+히틀러)라는 별명으로 대표가 됐다는 정황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당선후 기자들에게 ‘최딩크’(최병렬+히딩크)라고 불러 달라고 애교 있게 말했다. 그러나 누구도 아직 그를 ‘최딩크’로 부르지 않는다. 그의 측근들이 ‘최딩크’를 택한 것은 히딩크가 국민적 영웅이요, 국민화합을 이뤄낸 상징성 때문이다. 최틀러가 강한 추진력, 돌파력, 당의 확실한 장악을 뜻한다면, ‘최딩크’는 상생(相生)의 정치, 남ㆍ북이 하나 되는 것의 상징이었다.

히틀러는 그럼 최 대표처럼 행동했나? 아니다.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언론학 교수인 귀도 크놉은 독일 현대사를 연구, 히틀러를 도운 6명의 조력자를 통해 그의 정체를 밝혀 냈다( ‘히틀러의 뜻대로’ㆍ 1996년刊).

그 중 한명이 ‘최초의 히틀러 신봉자’였던 헤스였다. 그는 1차대전때 히틀러와 같은 부대에서 싸웠으나 1918년 전투 조종사가 되어 소위로 종전을 맞았다. 전선에 있을 때는 서로 몰랐다. 종전 후 대학생이 된 그는 1924년 뮌헨 쿠데타 후 감옥에 가 히틀러의 ‘나의 투쟁’ 집필 작업을 돕는 데 주력했다.

그 해 6월 히틀러가 ‘나의 투쟁’ 집필 중 한 몸이 돼 버린 것이다. 1918년 8월 참호속에서 죽은 전우를 묘사하는 글을 쓰며 히틀러가 눈물을 흘리자 헤스도 함께 엉엉 울었다. 하나가 서로 되어 버린 것이다. 직후, 그는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은 사랑 이상’이라고. 훗날 그는 히틀러가 “당의 대리인, 만약 나에게 일이 생기면 그가 나를 잇는다”고 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1941년 5월 10일, 헤스는 히틀러에게 작별 편지를 쓴 다음 메사쉬미트 전투기를 몰고 영국 상공에서 낙하산으로 착륙한다. 그는 영국의 심문관에게 영국에 온 이유를 설득력 있게 말한다. “나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최초로 비행한 해밀턴 공작의 저택까지 비행기로 가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영국의 요격을 피해 스코틀랜드까지 가기는 어려운 일이다.”

”통곡하는 어머니들 앞에 놓인 아들의 관이 내 조종간 창앞에 어른 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울먹이는 아이들 앞에서 독일과 영국 어머니의 관들이 떠올랐다. 나는 영국왕을 만나 독일과의 전쟁을 중지 할 것을 요청 할 것을 말하기 위해 영국에 왔다”고 했다. 뒤따른다. 그러나 처칠과 스탈린은 그의 독단적 결행이 영국과 러시아를 이간시키려는 ‘히틀러의 음모’라고 판단했다. 결국 헤스는 포로로 잡혀, 런던탑에 갇혀 종전을 맞았다.

그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정에서 종신형을 받기 전에 한 최후 진술은 ‘자기 존엄’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도 이뤄 놓은 것이 없다. 나는 양국 국민(독일, 영국)을 전쟁에서 맨舊?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 것에 행복하다.”

히틀러는 그의 영국행을 가리켜 “정신 이상에 의한 배신 행위”라고 몰았다. 그 같은 비난은 영국과 단독으로 평화를 음모했다는 무솔리니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 헤스는 독일의 러시아 침공전인 1941년의 독일속에서 1987년까지, ‘자기 논법’ 속에 산 히틀러의 희생자라고 보는 게 크놉 교수의 결론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든, 최병렬 대표에게든, 한국의 헤스가 있어야 통일이나 평화를 앞 당길수 있을 것이다. 그가 ‘최틀러’라는 별호를 벗고, 상생을 추구하는 ‘최딩크’가 빨리 되었으면 한다.

박용배 언론인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