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법 개정안 개혁 핵심부문 후퇴, 정부선 '속도조절' 강조

재벌개혁 물 건너 가나

공정거래법 개정안 개혁 핵심부문 후퇴, 정부선 '속도조절' 강조

참여정부 출범 6개월. “경제의 성장 없이는 다른 성공도 어렵다”는 경제 제1주의 인식에 무게가 실리면서 한동안 ‘분배’쪽으로 향해있던 정책 방향이 다시 ‘성장’쪽으로 힘이 옮겨가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 6개월 만에 경제정책 기조가 성장 잠재력 회복으로 초점이 맞춰진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8ㆍ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앞으로 10년 이내에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진입 목표를 위한 경제 우선정책을 펼 것”이라면서 “정부는 경제시스템이 무너지거나 성장 잠재력이 손상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계는 정책 기조가 이같이 수정되자 쌍수를 들어 환영한 데 이어 “경제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기업들이 마음을 놓고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기업 경영환경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정부의 로드 맵을 제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성장’에 기반을 둔 정부의 전반적인 정책 기조가 변화된 때문인지 재벌개혁의 주무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의 발언권 수위도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참여정부 출범 6개월만에 재벌 개혁에 대한 의지가 퇴색된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흘러 나오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6개월 이내에 개혁을 이루지 못하면 개혁은 완전히 물 건너간다”는 개혁 방법론을 실감이라도 하듯, 최근 공정위가 입법 예고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에서는 참여 정부의 재벌 개혁 의지가 후퇴한 듯한 분위기가 확연하다.


출자총액제한 강화 방안 제외

이번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과징금 최고 한도를 10억원에서 20억원으로 2배 높이고 기업 결합심사 규정을 까다롭게 하는 등 일부 권한 강화 조항이 포함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출자 총액 제한 강화와 내년 2월로 시한이 만료되는 계좌추적권의 영구 보유 등 재벌 개혁의 핵심 부문에 있어 당초 입장보다 크게 후퇴했다는 평가다.

공정위는 출자규제 예외 조항이 19개에 달해 계열사간 출자를 이용한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이 여전하다며 예외 조항 축소를 강력히 주장해왔으나 이번 개정안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투자가 살아나야 한다”며 재정경제부와 재계가 이에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또 출자 총액 제한 강화 방안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지만 법 개정 대상에서 조차 제외된 실정이다. 당초 재벌 지배 주주 및 일가의 지분 소유 현황을 개인별로 상세히 공개하겠다던 방침도 백지화되고 말았다. 지주회사 제도는 ‘자회사 간 출자 금지’등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이 일부 포함됐지만,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기업의 부담을 대부분 크게 줄여 주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정부 관계자는 “타부처들과 의견이 상충되는 부분이 많아 개정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선에서 타협한 것”이라며 “재벌 개혁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퇴색했다기 보다는, 개혁의 속도 조절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라고 ‘개혁 속도론’을 애써 강변했다.

하지만 재계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 규제안의 모순점을 꼬집으며 오히려 한술 더 떠 ‘성장’을 위한 재벌 옹호론까지 피력하고 있다. 그룹 지배 구조에는 정형화된 유형이나 틀이 없을 뿐 아니라, 개별 기업의 사정이나 기업의 문화와 역사 등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 지배 구조는 공정위가 나서기 보다는 개별 기업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논리다.

현명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차세대 성장 엔진으로 10개 품목이 제시됐지만 이들은 모두 미국, 일본 등이 엔조이 하고 있어 우리가 이를 키우려면 미국 등으로부터 빼앗아야 하는데 어떤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겠느냐”며 “현재 우리가 경쟁력을 가진 자동차, 전자 등은 과거 그룹 차원으로 뭉쳐 소니(Sony)같은 다국적 기업과 싸우고 리스크 테이킹을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재벌체제의 강점을 내세웠다.

현 부회장은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란 강자의 논리로, 서구 1류 기업들이 해왔던 것을 그대로 따라 하라는 것“이라며“우리한테는 무기를 버리라는 요구”라고 역설했다.


공정위 "이빨 빠진 호랑이 아니다"

그러나 공정위도 재계의 입장에 무게가 실리는 상황에서 모두 다 내줄 수는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결코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공정위는 이번 개정안 중 내년 2월로 시한이 만료되는 금융거래정보 요구권(계좌추적권)을 상설화는 하지 못할 망정 기간을 5년 연장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계좌추적권이란 자산 2조원 이상의 대기업 집단(현재 49개)이 부당 내부 거래를 한 혐의가 발견되면 금융거래 정보를 관련 금융 기관에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제도다.

이는 법원 영장 등이 필요 없이 직접 발동할 수 있는 막강한 ‘꼼짝 마’ 감시 체제인 셈이다. 정부는 1999년 5대 재벌의 부당 내부 거래 조사를 위해 한시적(2년 유효)으로 공정위에 계좌추적권을 부여했으며 2001년 기간을 3년 더 연장한 바 있다.

재계는 이 같은 개정안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재계가 ‘총력 투쟁’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이에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은 공정위가 언제든지 발동할 수 있는 계좌추적권을 보유함으로써 재계를 상시 감시하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 전경련 부회장은 “공정위가 30년 전의 사고를 갖고 공정 거래법을 유지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며 “공정위의 당초 목적이 독과점 규제인데 재벌 규제에 주력하고 있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공정위가 시한을 갖고 있는 계좌추적권을 계속 연장하려는 것은 법 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이라며 “꼭 필요할 경우, 국세청이나 검찰 등에 부탁해 계좌 추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정위가 계좌추적권을 연장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재계의 싱크 탱크인 한국경제연구소도 “공정위의 계좌 추적권은 금융거래의 비밀을 엄격히 규제한 금융실명제 입법 취지에 배치될 뿐 아니라 영장 없이 자율적으로 계좌 추적을 실시하는 등 남용 소지가 커 재연장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부의 맞대응도 만만찮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8월22일 “기업들의 적발된 부당 내부 거래중 87%가 금융기관을 통해 이뤄졌다”며 “계좌추적권의 보유 시한 연장이 불가피하다”고 재계의 주장을 일축했다.

강 위원장은 재계의 반론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금융실명제법에 따르면 목적 외 계좌추적권은 쓸 수 없으며 부당 내부 거래 조사를 금감위나 국세청이 해줄 수 없는 일”이라며 “재계는 부당 내부 거래가 없으면 반발할 필요가 없고 계좌추적권은 몇몇 내부 거래 공시 대상 회사에 대해서만 쓰는 것”이라고 계좌추적권의 기간 연장 입법 추진에 대한 타당성을 역설했다.

공정위는 10월말까지 ‘시장 개혁 3개 년 계획’을 발표해 출자 총액 규제의 개편 방안을 구체화해때 제시할 계획이다. 참여정부의 재벌개혁에 대한 의지의 불씨가 과연 되살아 날 것인지 올 10월이 주목된다.

장학만 기자


장학만 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