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선 사람 냄새가 풍겨야"

[석학에게 듣는다] 김종원 영화평론가

"영화에선 사람 냄새가 풍겨야"

‘영화 보기로 아침을 여는 날은 행복하다.’ 한국 영화 비평의 문을 연 김종원(66) 선생의 영화 사랑에는 아직도 소년의 열정이 간직돼 있다.

21세기 한국, 영화의 시대가 물밀 듯 밀려 오기 훨씬 전부터 선생은 영화의 힘과 미학을 꿰뚫어 보았다. 영상물 등급위원회 상임 위원, 청주대 연극영화과 겸임 교수, 영화평론가 등 세 직함이 그의 현재를 객관화 시켜줄 지는 몰라도, 제대로 설명해 내지는 못 한다. 자신을 묘사할 때, 반농담조로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돈 받고 영화 보는 사람이다.”


한국영화 비평의 산 증인

영화를 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니, 행복의 나날일 터이다. 15년째, 하루에 많으면 4편까지의 신작 영화를 본다. 국립극장 옆 영상물등급위원회 상근 위원으로서 신작 두 편의 심의를 막 마치고 난 14일 남산 국립극장옆 영상물등급 위원회 심의실. 이 날은 한국의 신인 감독 장항준이 만든 ‘불어라 봄바람’과 일본에서 수입한 ‘음양사(陰陽師)’가 심의 대상작이다.

“이 영화는 소설가와 다방 여종업원의 연애담이죠.”싯가 1억원 상당의 슈텐벡(Steenbeckㆍ독일산 영상 편집기) 레버를 조작해 ‘불어라 봄바람’ 필름을 앞으로, 뒤로 돌리면서 그는 말을 이어 갔다. “자르고 붙이는 건 공윤(공연윤리심의위원회)때나 통하던 애기죠.” 그의 작업은 예고편 제작과 관련해 필름을 점검하는 일이 주다. 이런 식으로 1년에 보는 새 영화가 400여편을 헤아린다.

“또 하나 더 있다면 수입 영화를 비디오로 제작하는 작업에서 영화 내용을 검토하는 거죠.” 흔히들 말하는 자르고 붙이는 일, 즉 가위질이 있다면 바로 이 대목이다. 수입 심의 과정에서 문제시 된 외화를 비디오로 다시 살려내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원래의 영화와 자막 원고 등을 비교ㆍ검토, ‘영화 예심 검토 의견서’를 작성한다.

2차로 개방된 일본 영화는 이제 해외 수상작의 경우는 무조건 국내 상영이 가능하다. 농밀한 사랑이 주제인 ‘감각의 제국’이 일반 극장에 무삭제 상영된 것은 그래서다. 그러나 일반의 인식과 예술적 요구가 예리하게 맞부딪칠 수 밖에 없는 그 작업은 끝까지 논란의 중심에 서 있을 터이다. 노인의 성을 적나라하게 다룬 ‘죽어도 좋아’가 그렇다.

할아버지의 남근 노출과 “커졌네 커졌어” 식의 대사 등 영화속의 적나라한 내용은 그를 비롯한 본심 심의 의원 7명의 골칫거리였다. 발기된 남근의 장면을 실루엣 처리하는 것으로 낙착시키는 데 3개월 동안의 내부 검토가 필요했다. 제작진이나 배우와는 일체의 만남도 없었다. 선생은 1982년부터 공연윤리 심의위원회(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전신)에서 이와 같은 작업을 수요일은 제외한 월~금요일 내내 해 왔다.

선생의 또 다른 축은 대학 강의다. 청주예술대 연극영화과 겸임교수로 ‘한국영화사’, ‘영화비평론’, ‘시나리오 작업’, ‘장르와 스타일 연구’ 등 네의 강의일이 수요일이다. 또 목요일은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에서 박사 과정인 ‘해방전 한국 영화사 연구’를 강의한다. 아카데미에서 이처럼 수요가 높은 것은 1988년 인하대의 초빙으로 실시한 강좌 ‘영화의 이해’가 큰 호응을 거둔 때문이다.

매주 금요일마다 그의 기획-해설로 15년째 해 오고 있는 강의 덕분에 인하대생은 안 본 영화가 없다는 부러움까지 덤으로 받는다. ‘피아골’, ‘자유만세’, ‘오발탄’, ‘검사와 여선생’, ‘서편재’ 등 한국 영화는 물론, ‘매트릭스’ 등 최신 외화의 속내까지 명쾌하게 풀어 주는 강의였다.

한운사(극작가), 임권택(감독) 등 한국 영화의 거장들을 해당 시간에 직접 모셔와 육성 강의를 베풀었고, 안성기(배우)는 ‘깊고 푸른 밤’에 대해 강의할 때 와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21세기 한국 영화의 꽃이 만개하기 전부터 선생은 자신의 자원을 총동원해 영화를 전도해 오고 있다. 두 대학의 강의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이 ‘공짜로 영화 보는 시간’이다.

선생은 또 MBC ‘연예가중계’, EBS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등 영화 관련 각종 TV 프로에서도 구수한 말솜씨로 영화 전도사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덤으로 한 음향업체에서 광고 모델로 모셔가기도 했다.


문학도에서 영화평론가로

선생의 출발점은 문학이었다. 1953년 제주 제일중 3학년때 ‘학원’지 창간 2호에 기고한 시(‘국화는 피어도’)가 실리면서 전국 문학 소녀의 팬 레터가 몰려들 정도로 언어 감각이 탁월했다. 동국대 국문과 3학년이던 1959년 ‘사상계’에 ‘달팽이’ 등 3편의 시가 게재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됐다. 그러나 선생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싶었다. “시는 내가 아니더라도 많이 쓰는데, 둘러보니 영화는 이론가도 없었죠.”

4학년 당시 ‘시나리오 문예’지에 쓴 논문 ‘앙가주망의 계곡’은 시인이 쓴 영화평이라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김기영 감독ㆍ안성기 주연의 ‘10대들의 반항’과 르네 클레망 감독의 ‘앙가주망의 계곡’ 등 두 편을 비교한 논문이었다. 편집자들의 호평에 힘입은 그는 전인미답의 한국 영화 평론에 뛰어 들게 된다.

한국 최초의 영화 평론은 1920년대 영화 ‘낙화유수’의 감독 이구영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조선 영화의 과거ㆍ현재ㆍ장래’라는 글이다. 이후 영화의 힘을 일찍이 간파한 카프(프롤레타리아 문학 동맹)의, 서광재 윤기정 임화 등이 영화 비평의 길을 텄다. 이어 1952년 부산 임시 수도에서 오영신 이봉배 등을 중심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발족했다.

한국 영화 평론의 본격적 기틀은 1960년 8월에 10명의 회원으로 창설된 한국영화비평가협회로 마련됐다. 고 이영일씨와 선생이 함께 만든 단체다. 그러나 1년 뒤 5ㆍ16 군사 쿠데타로 일체의 문화예술단체가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1965년 두 사람은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만들어 우리 영화 평론의 역사를 이어 갔다. 1960년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를 만들어 2대 회장을 역임한 데 이어, 1980년에는 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을 만드는 등 우리 영화 비평에 선생의 족적이 찍히지 않는 곳은 없다. 그것은 영화 예술과 현실 사회의 경계선에서의 삼투 기능이었다.

2001년의 수상자는 ‘춘향전’의 임권택, 2002년은 ‘오아시스’의 이창동이다. ‘평론가’와 ‘비평가’를 오가며 전개된 역사를 이야기하는 선생은 마치 오래된 일기를 펼치듯 했다.

선생은 “나는 항상 소수의 의견을 제시해 왔다”고 말했다. 획일적 군사 문화가 팽배한 사회에서 보다 다양한 영화를 일반인에게 전달돼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특유의 우회적 표현을 등장시킨 것은 고육지책이었다. ‘역작’이나 ‘가작’ 등으로 평해 당국의 예봉을 피했다.

그러나 수준 이하의 작품은 그의 질책을 벗어날 길 없었다. 그가 비판의 잣대를 들이댔던 신문 영화평의 경우, ‘…한다고나 할까’라는 식으로 말끝이 흐려져 나온 적이 있었다. 신문사 데스크에서 어조를 순화시킨 것이다. 두어번 그런 일을 겪은 선생은 아예 가판을 기다렸다, 보고 항의해 원래대로 되돌려 놓기까지 했다.


용감한 비판, 해직기자 되다

언론에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신문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1969~75년 조선일보에서 영화 기자로 근무한 것이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신문사에 상주해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던 시절이었다. 들고 일어난 젊은 기자들 중 두 명이 정부에 미운털이 박혀 ?겨 났지만, 신문사측은 전혀 그들의 방패가 되지 못 했다. 신문사를 박차고 나온 선생의 생계는 한동안 기자협회가 대 주기도 했다.

“유약해 보이지만 사실 저는 다혈질이죠. 1960년 4ㆍ19 시위대를 담은 유명한 외신 사진에 내가 찍혔더라구요.” 뒷날 여원사 사장이 된 김재원(당시 고려대4) 등과 함께 스크럼을 형성한 대열에 바로 그가 있었다. 4학년 등록금 납부 마감날, 돈다발을 들고 가다 데모대와 기마 경찰단이 대치하고 있던 자리를 보게 된 것이다. 구호를 외치며 합류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맨앞에 서게 됐던 것. 그 경험은 당시 세계일보의 청탁으로 실은 칼럼 ‘광장의 증언’에 기록될 정도였다. “신문사 파동때 왜 빠지지 못했던가 아시겠죠?”

이후 40대의 9년 동안 일동제약에 입사, 학술부에서 창업주의 전기를 대필하는 등 얘기치 못 했던 시련의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창작과 비평’ 등 당시 문예지에서 가끔 들어오는 청탁으로 쓴 시는 ?쳄?김종원’을 증거한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자책도 들었죠.” 자신의 고집 때문에 아내 김영자(60), 딸 영아(34) 등 단촐한 식구의 가장 노릇도 제대로 못 한다는 자책은 당시 선생을 가장 괴롭혔던 화두였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를 최우선시하는 선생의 미덕이다.


돈벌이로 전략한 한국영화

1983년 영화 ‘비구니’(감독 임권택) 제작 소식에 불교계가 들고 일어났을 때, 한국일보 지면에서 펼쳐진 찬반 논쟁에서 창작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찬성의 논지를 펼쳤던 것은 휴머니즘의 논지에서였다. 최근의 영화 풍토와 관련, 선생은 “폭력적 블록버스터가 시장을 지배하면서 영화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 선생은 ‘집으로’와 ‘오아시스’를 사람이 있는 요즘 한국 영화로 꼽았다.

선생은 “최근 시대적 추세인 양 불거지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할리우드와 홍콩 영화의 모방 차원”이라며 “그렇게 된 데에는 시나리오 빈곤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젊은 작가의 시나리오에 가벼운 상상력은 있을 지 몰라도 ‘사람’은 없어요.” 현재 한국 영화판에서 ‘잘 팔리는’ 시나리오 작가는 10여명인데, 그나마도 제작자의 의견에 좌우되는 수가 많다는 것.

우리 영화 산업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다시피 한 결과, 가장 피폐된 것이 시나리오라는 지적이다. 풍요속의 빈곤이 된 영화 현실을 말하며 선생은 빈한했던 과거를 돌이키고 있었다.

엉뚱한 일을 하며 식솔을 챙겨야 했던 선생의 40대가 그러나 어둠만의 시절이었을까. 선생은 “남자로서 중요한 40대를 버틴 것은 예술의 힘이었다”고 돌이킨다. 당시 ‘창작과 비평’에 실었던 시의 한 구절에는 선생의 심정이 그대로 투영된다. ‘광화문 지나다/뿔뿔이 흩어진 친구들…’.

혁명의 대오는 사라지고 친구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선생은 마음의 북극성을 잃지 않고, 그 행로를 좇아 왔다. 오늘도 슈텐벡 손잡이를 돌리며 영화를 뜯어 보고 있는 선생을 맨 앞 대열에 위치시키는 데, 한국 영화비평사는 조금도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장병욱 차장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