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에드워드 텔러와 金正日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회고록 ‘마담 세크리터리‘의 발간일(9월 16일)에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은 내내 가슴을 어둡게 한다. 추석 전후 휴간한 신문들 때문에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박사(9월 10일, 95세로 사망)의 사망일과 겹쳐 오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2000년 10월 평양을 찾은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말했다. “전통을 유지하는데 해가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구식 개방을 원치 않는다. 시장 경제와 사회주의가 혼합된 중국식 개방에는 관심이 없다. 전통적 왕권이 강력하게 유지되면서,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을 유지하고 경제도 발전 시켜온 태국 모델에 깊은 관심이 있다.”

군사 문제와 관련한 발언이 빠질 수 없다. "미사일 개발은 외환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주체 프로그램의 일부로 우리 군을 무장한다. 북한군은 한국의 능력을 우려하지만 한국의 사거리 500km 미사일을 개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우리도 안 할 것이다.” 요즈음 이야기 하는 ‘체제 보장’에 대해서 김정일 위원장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핵과 미사일 발사거리 연장 정책이 무엇 때문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민족 통일이 아니라, 김일성 부자왕국으로의 하나됨이 그의 목적인 것이다.

1945년 7월 16일 새벽 5시. 미국 뉴멕시코 주 아라마고르도부터 50마일 떨어진 사막에서 텔러 박사는 보호안경을 쓴 채 모래 벌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카운트 다운이 제로 30초전에 멈추었다. 사막은 새벽녘이어서 무척 어두웠다. 한 줄기 빛 같은 것이 1초동안 비쳤다. 그리고 2초가 지나 빛이 사라졌다. 그는 보호안경을 벗고 사막을 내려 봤다. "그것은 커튼을 걷어 내자 밝은 햇빛이 스며드는 듯 했다. 그리고 몇 초 ,후 나는 거대한 섬광을 볼 수 있었다.”

헝가리 출신 유태계 변호사의 외아들로 독일 라히프니츠 대학에서 양자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덴마크, 영국을 거쳐 85년에 미국에 왔다. 여러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키다가 41년 미국 시민이 되고 43년 원자탄을 만드는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의 이론팀에 속해 이날의 폭파 실험이 성공 할 때까지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2001년, 그는 회고록 ‘20세기 정치와 과학’에서 이날의 실험을 요약했다. “우리가 이날 이룬 새로운 힘을 가진 미국은 ‘어떤 일’을 한 최초의 국가가 될 것이다.” 그것은 평화와 세계정부 구성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가지지 않은 것과, 그 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이 49년 원자폭탄을 갖게 되기 전에 미국이 첫번째 소유국가가 된 것을 기뻐했다.

이 폭발 장면을 기자로써 유일하게 참관한 뉴욕 타임스의 윌리암 로렌스는 그 후 해제가 풀리자 이날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수많은 태양이 하나가 되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녹색 빛이 나는 ‘수퍼-태양’이었다. 함께 참관한 어느 과학자는 ‘지구의 마지막 모습’이라 했지만 나는 다르게 느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보다 더 치솟은 버섯 구름. 폭발후 100초가 지나 울리는 굉음과 열기. 버섯 구름은 자유의 여신상 같기도 보였다…(중략) 피어 오르는 구름은 불을 발견하고 춤추는 원시인 같기도 하고 중력에서 탈출하는 자유스런 인간 같기도 했다.”

텔러는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후 원자와 원자의 폭발로 생기는 원자탄을 분자와 분자의 융합으로 그 위력이 원자탄의 100배가 넘는 수소탄은 만들 것을 주장했다. “공산권이 된 헝가리에서 내 가족이 겪는 고통과 죽음은 소련이 수소탄을 먼저 가질 때 되살아 날 것이다. 인류는 또 한번 전제자 아래 살게 된다. 미국이 먼저 수소탄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983년 로럴드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 초청을 받고 ‘소위 스타 워즈’라고 불리는 ‘공격적 미사일 방어 체제(SDI)’에 대한 연설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갈수록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는 국가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위협을 받고 다시 보복을 하는 것보다, 먼저 평화적인 무력 시위를 통해 그들의 위협이 쓸모 없다는 것을 증명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텔러는 1961년부터 제2의 핵 연구기관인 로렌스 리버무어에서 연구를 계속 했으며 ‘스타워즈’라고 불리는 미사일 방어체제(SDI)가 평화를 이루려는 미국의 첩경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소의 소장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는 마음과 얼을 이 연구소에 바쳤다. 국가의 안보를 위한 진력은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 부시 대통령은 그에게 미국 시민에게 최고의 훈장인 자유 메달을 수여했다. 이에 대해 텔러는 “나는 긴 생애동안 내가 올바르게 행동했는 지를 자문해 왔다. 이 메달은 나에게 축복이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그날 폭발을 총 지휘한 연구소장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인도의 경전을 인용하며 했던 말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 죽음으로 변했다. 나는 세계의 파괴자가 됐다.”

김정일 위원장은 텔러 등 핵물리학자들의 생을 통해 핵과 한반도 통일이란 문제, 미국을 지지하는 핵과학자들의 신념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가 그의 ‘김일성 부자 왕국’을 계속 영위하려면.

박용배 언론인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