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할 수 없는 끼, 국가 대표급 여가수

[추억의 LP여행] 정훈희(上)
주체할 수 없는 끼, 국가 대표급 여가수

콧소리가 밴 매혹적인 목소리로 1970년대 국내외 뭇 남성들을 사로잡은, 국제가요제 첫 수상가수 정훈희. 그녀는 도쿄, 그리스, 칠레 등 세계 유수의 국제가요제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던 한국의 대표가수였다.

데뷔 곡 ‘안개’ 뿐만 아니라 ‘그 사람 바보야’, ‘꽃길’, ‘꽃밭에서’ 등 그녀의 수많은 히트곡은 지금껏 대중의 마음속에서 떠날 줄 모른다. 또한 시원한 외모로 유달리 남성 팬들이 많았던 그녀는 젊은 시절 한때 풍성한 스캔들로 대중의 이목을 끌었던 뉴스메이커이기도 했다.

정훈희는 1951년 6월 8일 피아니스트인 부친 정근수씨의 5남1녀 중 외동딸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밴드마스터였던 삼촌 근도씨, 큰오빠 운택씨 등 네 명의 오빠가 모두 밴드에 소속돼 색소폰이나 기타 등을 연주했던 대중음악가 집안이었다. 당연히 음악속에서 자랐다.

그녀는 또 부산 미아 초등학교 시절 배구부 주장을 맡는 등 모든 면에서 적극적이었다. 부산여중 때 최희준, 현미, 패티 김, 이미자의 히트 곡과 낸시 윌슨, 레이 찰스, 프랭크 시나트라 등 60년대의 스타가수들 노래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 부산여상에 진학한 67년 5월 어느 날, 노래를 부르고 싶어 무작정 상경을 해 밤무대에 섰다. 그때 부른 노래는 외국 팝송이었다.

당시 오빠 운택씨의 소개로 그녀의 출연업소를 찾았던 이봉조는 “정훈희는 기성가수들 노래의 모방을 넘어 독창적인 자신의 음색으로 노래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데뷔 곡이자 대표 곡인 ‘안개’는 처음엔 가사도 없이 쟈니 브라더스의 허밍만이 들어간 연주곡으로 발표되었던 이봉조의 미완성곡이었다.

17세의 어린 정훈희에게 가능성을 발견한 이봉조는 당시 mbc라디오 박진현 음악PD에게 가사를 의뢰해 그녀에게 주었다. 67년 mbc라디오를 통해 첫 전파를 탄 ‘안개’는 그 날부터 팬들의 신청곡 요청이 쇄도했다.

데뷔 앨범 <안개-신세기, 1967년>이 나오자 몇 차례에 걸쳐 재 발매를 할 만큼 팔려나갔다. 단숨에 신인유망주로 떠오른 정훈희는 데뷔 4개월만에 서울신문의 무궁화상, 대구ㆍ대전 MBC의 10대가수상, 국제신보, 영남일보의 신인상 등 5개의 상을 연거푸 수상하는 초고속 인기행진을 벌였다.

하지만 지나친 인기는 구설수를 불러오는 법. 당시 ‘돌아가는 삼각지’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호와 핑크빛 소문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급기야 그녀의 출연업소였던 나이트클럽 ‘코파카바나’에 술을 전혀 못하는 배호가 매일 나타나면서 ‘뜨거운 관계’라는 스캔들로 확산되었다.

데뷔11개월 만인 68년 9월 시민회관에서 열린 제4회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배호가 남자가수상, 정훈희가 여자신인상을 함께 수상하자 두 사람은 장안 참새 떼들에게 혹독한 유명세를 치러야만 했다. 1년 뒤 정신과 의사인 김모씨와 심야의 데이트설 등 인기가수로 성장한 정훈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부담스러울 만큼 지대했다.

68년 말 신세기에서 지구로 전속을 옮긴 뒤 가수, MC, 탤런트라는 1인 3역의 재능을 뽐냈다. TBC 드라마 거북이에 단역 연기자로, MBC 크라운 쇼에서는 곽규석과 함께 사회를 보며 활발한 연예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봉조와 헤어지면서 가수로서는 슬럼프를 맞고 있었다. 재기를 위해 그녀는 오아시스로 또다시 옮겼다.

70년 11월 20일 38개국 44개 팀이 경연을 벌인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 국내가수로는 최초로 정훈희는 ‘안개’를 열창해 월드 베스트10에 입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단숨에 국제가요제 첫 참가, 입상자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긴 그녀는 산레모 등 유럽의 유명 가요제에 초청설이 나돌며 주가를 더욱 높였다.

그 해 12월 갑자기 “결혼 때문에 은퇴한다”는 스캔들이 터졌다. 이번 상대는 전 서울시장 김현옥씨의 큰아들인 김구씨.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설은 해프닝에 그쳤다.

71년 국내영화사상 최초의 시도였던 박종호 감독의 하드 보일드 영화 ‘들개’에 30만원의 개런티를 받고 영화배우로 변신을 시도했다. 정훈희는 여주인공 월이 역을 맞아 신성일과 함께 애정에 굶주린 젊은이의 섹스와 폭력을 담은 대담하고 과감한 연기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그 해 12월 25일 발생한 대연각 호텔화재사건은 그녀의 꿈 또한 빼앗아갔다. 당시 오빠들과 7인조 캄보밴드를 결성해 이 호텔 21층 나이트클럽에서 패밀리 쇼 공연을 해온 그녀는 푼푼이 모은 돈을 塚玟?300만원 상당의 악기를 오빠들을 위해 마련했었다.

큰오빠 운택의 전자 오르간, 둘째 오빠의 앰프 기타 그리고 바이올린 섹소폰 마이크시스템 일체가 이 화재로 고스란히 타버렸던 것. 아픔을 딛고 72년 4월 소녀 취향의 ‘꽃길’ 과 김학송 곡 ‘빗속의 여인들’을 연이어 발표해 좋은 평을 얻으며 용기를 얻었다.

불행하게도 그 해는 기록적인 홍수로 전국이 물바다로 변했다. 그래서 ‘비’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대중 탓에 비를 눈으로 고쳐 ‘눈 속의 여인들’로 재 취입해야 했다. 가요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입력시간 : 2003-10-0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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