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적 해결원칙 속 강경기류 여전, 노·부시회담서 해법마련

美 "북핵 해결에 당근은 없다"
평화적 해결원칙 속 강경기류 여전, 노·부시회담서 해법마련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워싱턴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최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북한ㆍ미국ㆍ중국 3자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 보유라는 뜻하지 않은 폭탄 선언에 맞부딪친 미 행정부의 동향이 범상치 않은 것이다.

외교를 통한 평화적 해결 원칙이 미 최고위층 인사의 입에서 아직 오르내리고 있으나 안심할 정도는 아닌 듯 하다. 지금까지 흘러나온 미 언론의 보도만을 보면 미 행정부내 물밑 기류는 대북 강경 압박책을 거론할 만큼 험악하다. 이러한 속내는 5월11일부터 시작되는 노무현 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15일로 예정된 한미정상 회담 때문에 상당히 가려지고 있는 느낌이다.

심각한 상황을 단적으로 반증하는 사례는 3자 회담 이후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4월 29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 주재 고위 당국자 회의.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 중동 순방 중이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대신한 폴 월포위츠 국방 부장관 등 핵심 안보 관계자들이 참석한 대북정책 점검 회의였다.

국내 언론들은 크게 부각하지는 않았지만 AFP통신은 이 회의 결과에 대해 “미국은 북한의 패키지 딜(Package Deal)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고 타전했다. 로이터 통신도 “미국은 북한에 굴복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해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이 중유 공급 등 경제 지원을 제공하고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폐지하는 가운데 북미 외교관계를 정상화한다면 핵은 물론 미사일 (실험발사 및 수출) 활동을 동시적으로 폐기할 수 있다는 3자회담에서의 북측 주장이 먹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핵 폐기 대가 없다”

회의 직후 애리 플라이셔 미 백악관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핵 폐기의 대가로 선물을 줄 의향이 조금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특히 클린턴 행정부 당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플라이셔 대변인은 “북한은 미국(클린턴 행정부)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뒤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 회의 이후 일본에서는 대북 강경론이 세를 얻는 가운데 재일 조선인의 대북 송금저지, 북한 선박에 대한 검색 등을 포함한 압박책이 논의되고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으며, 영국과 독일 언론에서도 지난해 말 미국에서 논의됐던 ‘맞춤형’ 대북 봉쇄 방안이 다시 거론됐다. 맞춤형 봉쇄란 본래 북한의 미사일 수출을 저지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대북 경제 교류를 전면 중단하고 미국과 일본 군함들이 북한 인근 해역에서 북한 선박을 검색하는 것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미국이 베이징 3자회담이후 향후 대북 대화를 포기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경솔하다. 미 행정부 관리들은 북한은 이라크와 다른 케이스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적 방식의 해결이라는 대원칙은 아직은 강고한 듯하다.

전문가들은 미 행정부의 현재 분위기가 3자 회담 결과에 대한 면밀한 분석 이후 대처 방안을 논의하는 와중에 조성된 전략적, 전술적 대응이라기 보다는 대북 협상 자체에 대한 미국의 불신에서 비롯된 총론적 태도를 반영하는 측면이 짙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3자 회담 직후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북한은 3자 회담이 어떻게 굴러가든 간에 부시 행정부가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대북 정책의 궁극적 목표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미국은 북한이 어떤 협상을 하든 간에 핵무기를 개발하려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북미 양국이 서로를 이렇게 불신하면서 진행하는 3자 회담의 전도는 우려될 수 밖에 없다. 부시 대통령이 3자 회담 직후 북한의 핵 보유 및 사용후 핵 연료봉 재처리 선언에 대해 “우리는 협박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퉁명스럽게 반응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간단히 말해 대북 협상이라는 긴 여정을 시작한 부시 행정부내에는 아직도 협상 필요성에 대한 회의가 말끔히 가셔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전략 논쟁 불지핀 대북정책

대북 협상의 효용성에 대한 회의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필두로 한 강경파와 파월 국무장관을 정점으로 하는 온건파간들이 대북 정책 주도권 경岾?벌이면서 최대 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현 단계에서 이 점이 향후 미국의 대북 정책과 3자회담의 앞날을 가를 핵심인 듯하다.

강경파든 온건파든 북한 정권을 불신하는 것은 같으나 협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자연 강경파가 득세하면 대북 협상은 현안에서 밀릴 가능성이 농후하고, 반대로 온건파가 주도권을 잡으면 3자회담 등 대북 협상은 비중 있게 다뤄질 것이다.

대북문제를 둘러싼 강경ㆍ온건 싸움은 불가피하게 행정부내 권력 투쟁 양상으로 전개된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싸움의 배경에는 이라크전의 승리를 통해 군사전략 자체가 외교를 대신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럼스펠드 장관과 군사적 일방주의를 지속한다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뿐이라고 주장하는 파월 장관간의 세계전략 논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세계전략 논쟁의 제 1막 제 1장으로 대북 정책이 설정된 것이다.

강온파 대결은 럼스펠드가 선공을 가하면서 촉발됐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3자 회담 시작 직전 그는 중국과 협력해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대북정책의 목표로 설정돼야 한다는 메모를 행정부내에 회람시켰다. 국무부 고위관리는 메모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또 무슨 연기를 피우는가. 그들(국방부 강경파)은 딴 세상에서 살기라도 한단 말인가”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 관리는 중국이 맹방인 북한의 전복과 이로 인한 대규모 난민사태를 원할 리 만무하다는 점을 들어 럼스펠드 장관의 메모를 ‘완전한 환상’이라고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국방부쪽의 선공은 이라크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국무부가 국방부를 따돌리고 3자회담을 성사시킨데 대한 반격의 성격이 짙었다. 사실 파월은 3자회담 추진과정에서 럼스펠드 등 행정부 매파를 철저히 따돌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2월 중국 방문후 한 달이상 3자 회담을 준비해온 파월은 북한과의 회담에 반대할 것이 뻔한 매파들을 배제하기 위해 통상적인 절차인 국가안보회의(NSC)를 통하지 않고 백악관과 직접 이 문제를 담판지었다. 럼스펠드는 이 같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일본 관리들로부터 정보를 듣고 서야 사태를 파악,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부시가 3자회담 추진을 승인한 뒤였다.


미행정부 강ㆍ온파간 암투

하지만 순순히 물러날 럼스펠드가 아니었다. 럼스펠드는 3자회담 대표로 내정된 온건파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대신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존 볼튼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을 대표로 앉히려 압박을 가했다. 지난해 10월 켈리 차관보가 특사로 방북하려 했을 때 북한의 농축 우라늄 방식의 핵 개발 계획을 포착한 미 강경파가 볼튼 차관을 대신 보내려 했던 양상이 재현된 것이다.

이 시도가 좌절된 매파들은 3자회담 직후 국무부가 3월 31일 뉴욕채널을 통해 8,000여개의 사용후 핵 연료봉을 재처리하고 있다는 북한측의 통보를 전달받고도 이를 묵살했다고 주장하면서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암투의 심각성에 대해 미 언론조차 혀를 내두르고 있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두 부처의 알력은 부시 행정부 출범이후 2년 동안 지속된 것이지만 3자회담을 계기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이 알력에 대한 중간 평가는 어떨까.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등은 외교적 해결방식이 결국 채택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이 현지 관측통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오히려 현실정치에서 세를 얻고 있는 강경파의 승리를 점치는 시각도 있다.

뉴스위크는 “강경파들의 접근이 환상이건 아니건 간에 지금까지 나타난 전개양상은 강경파가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전했다. 강경파들은 북한과의 대화가 가져다 줄 유일한 이득은 그들이 얼마나 호전적일수 있는지를 입증해보이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 북한이 베이징 회담에서 핵 실험이나 핵무기 수출로 위협함으로써 강경파의 주장이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모든 권력 투쟁에서 한쪽의 일방적 승리가 쉽지 않듯 이번 알력도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로 귀착되지는 않을 듯 하다. 이런 징후가 5월1일자 뉴욕 타임스의 북한 핵 개발 현황 재검토 보도이다. 이 보도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사용후 핵 연료봉을 재처리했다는 3자회담에서의 북한 주장을 검증하도록 미 정보기관에 지시했다.

부시 대통령의 지시는 사실에 입각해 북한 핵 문제를 재검토함으로써 불퇴전의 각오로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 강온파 양측에게 휴지기를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3자 회담 속도조절론 시사

특히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1일 아소 慕?일본 자민당 정조회장등을 만나 한 발언은 북핵 핵 문제에 대한 향후 미국의 입장을 시사하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천천히, 착실히, 끈기있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3자회담을 지속할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은 마련되지 않았지만 온건파들이 주장하는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은 지속될 것이라는 암시이면서면서도 강경파를 의식, 그 속도와 방식은 매우 신중할 것이라는 시사이다.

물론 미 일각에서 제기되는 유엔 안보리 성명을 통한 북한 핵 보유 비난, 저강도 봉쇄, 북한문제의 안보리 의제 상정 등의 수단도 외교적 수단과 병행될 가능성을 현재로서는 배제하기 어렵다.

이같이 복잡한 미 행정부 기류 속에서 이뤄지는 한미 정상회담과 미일 정상회담(5월22일)은 미국의 대북정책 결정의 또 다른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이라크 전을 통해 일방주의를 강화하고 있는 미국이라지만 동북아 상황은 이라크와 매우 판이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는 이번 방미가 외교적 방식으로 북한 핵 문제를 푸는 계기를 마련할 회담으로 기록되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이영섭 기자


입력시간 : 2003-10-01 17:44


이영섭 기자 young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