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본 화성연쇄 살인사건

살인의 추억이 되살린 기억 저편의 악몽들
영화로 본 화성연쇄 살인사건

이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살인의 악몽, 아니 ‘살인의 추억’이 초여름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다. 15세 이상 관람가로 등급이 매겨진 영화가 초여름 한반도 이남 지역을 얼어 붙게 하고 있다. 상영 시간 127분 동안은 냉방이 필요 없다.

4월 25일 극장 개봉한 이래, 티켓 예매 순위 1위다. ‘매트릭스2’, ‘10일안에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법’, ‘엑스맨2’, ‘와일드 카드’ 등 동시 개봉한 흥행 2~5위의 영화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1위다. 2000년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공동 경비 구역 JSA’의 기록을 넘어서는 관객 동원력이다.

개봉 일주일만에 전국에서 동원한 85만명이라는 관객수는 극장 비수기인 4월 성적으로는 사상 최고. 개봉 10일만에 전국 200만을 돌파해 올해 최대의 흥행작이 된 이 영화는 개봉 3주째가 되는 5월 17~18일에는 300만명 돌파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도, 패러디도 ‘장외홈런’

바람은 온라인쪽으로 오면 더 거세진다. 개봉 이후 홈 페이지 방문자 폭주, 4월 29일 밤에는 홈 페이지가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개봉하고 난 이후 접속이 폭증했다는 현상은 이례적이다. 입소문이 만든 흥행 대행진이라는 말이다.

4월 25일 2만 2,000여 건을 기록한 이래, 29일은 3만 2,900여건으로 사상 최대 접속수를 기록하면서 한때 홈 페이지가 다운되기도 했다. 보고 난 뒤에 할말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에로 영화의 노컷 필름이 아닌 영화가 다운된 사태는 일찍이 없었다. 제작자인 사이더스 측은 원래 10메가바이트로 설정돼 있던 회선 수를 100메가로 늘리는 등 임시 조처로 복구해야 했다. 자유게시판도 사정은 마찬가지. 개봉 이전에는 하루 통수가 700여개였으나, 5일째는 3,000여통을 넘어 선 것이다. 보통 영화의 홈페이지 접속 수는 개봉전에는 5,000통, 개봉 이후에는 1만통 정도다.

패러디 열풍이 이 화제의 영화를 그냥 둘 리 없다. 개봉 직후 한 네티즌이 일본 지하철 독가스 소동의 주인공이었던 사린 가스를 빗대 ‘사린의 추억’이라고 한 것이 출발이었다. 그 후 패러디는 정계의 일각으로 건너 갔다.

민주노동당이 5월 13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현판식을 가진 ‘전두환 은닉 재산 신고 센터’가 그 주인공이다. 살인의 추억이 아니라, ‘삥당의 추억-대한민국 범죄를 책임진다’라는 제하의 포스터다. 재산을 파묻어 두고 땀을 훔치는 전씨의 캐리커쳐를 그려 ‘위 사람의 은닉 재산을 신고하는 분께는 당사로 전화를 하라’는 문구를 달아 두고 있다.

2000년 ‘플란더스의 개’로 데뷔한 이래, 이번에 이 영화로 장외 홈런을 친 봉준호(34) 감독은 “피해자 가족이 이 영화 때문에 상처 입을까봐 절에 모여 천도제를 지냈다”며 “무엇보다 살해당한 희생자, 억울하게 취조 당한 용의자, 범인 검거에 실패한 형사, 아직도 악몽을 잊지 못 하는 화성 주민 모두에게 누를 끼친 듯한 마음은 변함 없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그러나 “기억 자체가 응징의 시작”이라며 이 영화의 ‘정당성’을 압축했다.


독재의 족쇄를 비웃은 연쇄 살인

모두들 미쳐 간다. 어디엔가 분명 있을 범인이 죽인 것은 소낙비 퍼붓는 칠흙 같은 밤 시골길을 걸어 가던 애궂은 여인들뿐만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사회적 안전 장치, 법과 치안 기구의 존재 논거가 뽑혀 나가기 시작했다.

1986~91년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반경 2㎞ 이내에서 6년 동안 10차례의 강간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71세 노인에서부터 13세 여중생까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한국 최초의 연쇄 살인 사건. 더욱이 사체를 잔혹하게 유린한 범인의 행각은 사회의 안전망에 대한 노골적 야유였다. 전형적 농촌 마을에서 시작된 얼굴 없는 살인 사건은 전국을 들끓게 한다.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고 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과 조용구(김뢰하 분), 서울 시경에서 자원해 온 형사 서태윤(김상경 분)이 가세한다. 지방 형사와 서울 형사는 육감에 의한 수사와 과학적 수사를 상징하면서 사사건건 대립이다.

그러나 머잖아 둘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희대의 연쇄 살인이라는 거대한 범죄 앞에서 둘은 범인 찾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일 뿐이었다. 게다가 독재와 반독재 투쟁으로 점철된 당시 상황까지 겹쳐 영화 속은 한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영화가 긴박감을 주는 데에는 당대 분위기를 충실히 재현하려는 노력도 한몫 한다. 요즘 유행하는 환타지물들이 비현실을 좇는 것과는 정반대의 전략으로 동 시대인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다. 관공서마다 제일 좋은 자리에 모셔져 있던 자의 사진과 형사계 사무실에 있는 부인의 사진에 관객들은 당시의 숨막힐 듯한 분위기에 맞닥뜨린다.

민방위 훈련 경보에 따라 사회가 작동을 멈추던 때. 아무 때라도 울리는 민방위 훈련 경보와 경찰의 폭력적 자세 등이 재현된다. 영화는 그러나 시골 마을의 연약한 부녀자들만을 상대로 벌어지는 엄청난 폭력에는 전혀 손을 쓰지 못 하던 시대에, 그것들은 무슨 의미를 띠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범인은 비 오는 밤, 잠복 이후 범행 대상을 골랐고 범행 도구는 늘 피해자가 지니고 있던 물건 중 하나였다. 손과 발을 브래지어로 묶은 뒤 팬티나 거들로 머리를 씌운 뒤 강간과 살해를 자행했다.

수법은 회수를 더함에 따라 대담하고 침착해져 갔다. 가슴이 19차례 난자되는가 하면 국부에서는 복숭아 조각이 9개나 나왔다. 범행 뒤에는 다시 옷을 입히거나 얌전히 개어 시체 주변에 놓아 두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범인은 일체의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인근 태안 지서에 특별수사 본부가 설치되고, 베테랑 형사가 투입됐다. 그러나 당시는 형사들의 사명감과 지구력에 의존한 끊임 없는 탐문 수사만이 있을 뿐이었다. 영화 곳곳에서 재현되는 수사 상황은 현장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던 형사들, 그들의 무력함을 지켜보는 주민들의 절망에 확대경을 들이대면서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도사리고 있던 상처를 다시 확인시킨다.


신들린 연기, 시나리오도 불티

송강호의 연기에 찬사가 쇄도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역사는 송강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마지막 송강호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다’는 한 네티즌의 반응이다. 그만큼 그의 연기는 리얼했다.

또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에서 신인 연기상(‘청춘 예찬’)을 탄 이후 주목 받은 박해일이 이 영화에 출연해 펼쳐 보이는 혼신의 연기에도 감탄이 이어지고 있다. 덕분에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 김뢰하 등 주연급 배우들은 봉준호 감독과 함께 개봉후 쉴 수도 없다. 5월 17일은 대전과 대구, 18일은 광주 등으로 전국 팬들과의 만남이 준비돼 있다.

사회에 던진 직접적 여파도 만만찮다. 여고생들 사이에서는 ‘살인의 추억 놀이’가 유행하고 있다. 첫 번째 용의자인 백광호의 말버릇인 “나야 모르지”를 흉내 내거나, 영화 속에서 주요 모티브로 등장했던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휘파람 불며 귀가하는 식이다. 시골뜨기 형사 송강호의 말투가 빠질 수 없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밥은 먹고 다니냐?” 등 영화 속 그의 거친 어투가 인기 상한가를 넘보고 있다.

성공의 여진은 시나리오 출간, OST 출시 등으로 그칠 줄 모른다. 당초 영화의 흥미를 유발해 내기 위해 시나리오의 외부 유출을 최대한 막기로 했으나, 정식 개봉 전부터 시나리오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시나리오는 충무로 일대에서 필독서가 되다시피 했다.

팬들의 요구에, 책은 영화속의 말투 그대로 이례출판사에서 5월 1일 발행됐다. 극장 스크린만으로는 영화의 폭발력을 담아 두기에 비좁다.

5월 10일 서울지방경찰청 청사에서는 소속 경찰들의 관심이 모아진 가운데 시사회도 열렸다. 공보과 박상경 반장은 “검거에 실패한 사건을 거울 삼아 직원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자는 차원으로 시사회를 벌였다”며 “공소 시효가 지나더라도 끝까지 수사하겠다고 한 형사도 있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5월 24일은 국회에서 시사회도 열릴 예정이다.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영화동호회 ‘신씨네’ 주최로 국회 대회의실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이다. ‘신씨네’란 ‘새로운 영화(新cine)’라는 뜻을 가진 순수 영화 동호회로,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행자위 소속 신계륜 의원의 성(姓)과 시네마라는 단어를 합성한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의 엔딩 사인이 완벽한 결말은 아니다. 지긋지긋한 형사 옷을 벗고 녹즙기 회사를 차린 송강호가 우연히 화성에 다시 들른다. 여인의 시체가 처박혀 있던 논둑 배수관을 지나게 된 그는 현장을 재확인하고픈 충동을 못 이긴다.

형사 시절처럼 배수관 속을 뜯어보는데, 마을 아이가 “다른 아저씨도 보고 갔다”고 말한다. 그 ‘아저씨’란 누굴까? 범인은 현장에 꼭 다시 온다는 고전적 수사 격언대로 범인일까, 아니면 그 옛날 흙탕물속에서 논두렁을 뒤지던 동료 형사 중 한 명일까? 영화는 그렇게 연쇄 살인 사건을 계속 ‘추억’하고 싶은 것일까?


연극도 버전업, 팔 걷어 붙여

연극도 화제 행렬에 동참했다. 영화 개봉에 발맞춰 여덟번째 무대를 올린 것이다. 화제의 영화는 사실 연극 ‘날 보러 와요’의 후예다. 봉감독은 “96년 대학로 문예회관에서 봤을 당시의 충격과 감동을 잊을 수 없다”며 “이후 그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꿈꿨다”고 말했다.

연극의 판권을 얻어 영화로 완성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2년 8개월. 1년은 시나리오 작업, 1년 8개월은 영화 제작 작업에 쓰였다.

여덟번째가 되는 이번 무대는 영화와의 동시 개막을 의식, 시청각적 배려가 돋보인다. 스크린을 이용한 영상물을 적극 구사, 객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여자의 괴성과 발자국 소리 등 긴장감을 자아내는 효과음들 사이 사이에 흘러 나오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밤샘의 피로를 잊기 위해 서울 형사(권해효 분)가 틀어 두는 음악이다.

배우들의 동작과 말투마다 힘이 넘친다. 특히 변태 성욕자인 주요 용의자 류태호가 붉은 팬티를 입은 채 심문 당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류태호는 영화에서도 변태 성욕자로 등장, 열연을 펼친다. 6월 12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연출 김광림)

살인 사건의 공소 시효는 15년이다. 1~8차는 이미 공소 시효 만료됐으나, 9차와 10차 사건은 공소 시효가 각각 2, 3년씩 남아 있다. 9차는 1990년 11월 15일, 10차는 1991년 4월 3일 발생했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기억은 도대체 언제까지 유효할까.

입력시간 : 2003-10-0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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