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하춘하(上)


기네스 북에 등재된 대중 가수 하춘화.

‘리사이틀의 여왕'으로 불리는 그녀는 가요계의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1,300여 회에 달하는 개인 공연, 최연소(6세) 독집 발표, 최연소(11세) 음반사 전속, 71~77년 연속 MBC 10대 가수상 수상, TBC 방송 가요 대상 4회 수상, 7대 가수상 연속 7회 수상 등 수백 회의 수상 기록, 2,000여 곡의 신곡 취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게다가 그 흔한 스캔들도 없는 데다 불우 이웃 돕는 봉사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해 문화훈장까지 받았다. 그녀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대중 예술인이다.

하춘화는 1955년 5월 11일 부산 초량동에서 선박용 로프회사인 동아강관 전무였던 부친 하종오씨와 모친 김옥순의 4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으로 노래를 빨리 배우고 잘 불렀다고 한다. 어릴 적 별명이 울보였는데, 막무가내로 울다가도 노래가 나오면 울음을 뚝 그쳤을 만큼 음악을 좋아했다.

부친 하씨는 “어린 나이에 유행가를 너무 잘 불러 귀엽긴 했지만, 걱정도 많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서너살 때 이미 200곡이 넘는 레퍼토리를 가졌던 그녀는 이웃의 미장원이나 양장점의 언니들의 간청에 못 이겨 과자를 받고 노래를 해야 했던 동네 최고의 인기 가수였다.

4살 때는 막내 고모 화자씨를 졸라 매일 극장쇼 구경을 다녔다.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린 업스타일을 한 박재란의 공주 머리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해달라고 조를 만큼 박재란은 당시 그녀의 우상이었다.

4ㆍ19 직후 만 5살의 하춘하는 고모 손에 이끌려 부산 제5 육군 병원에서 부상 학생과 시민을 위한 자발적인 위문 공연을 가졌다. 깜찍한 어린 아이의 노래에 병원은 난리가 났다. 때마침 이곳에 왔던 한 지방지 기자가 ‘재롱동이 천재꼬마 탄생’이라고 신문에 소개하기도 했다.

서울로 온 뒤 수송초등학교 입학 전 아버지를 따라 동화백화점(현 신세계)에 있던 동화음악 예술 학원에 찾아 갔다. 처음에 귀찮은 기색을 보이던 작곡가 형석기씨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후 열심히 음악을 익혔다. 집안의 응석 꾸러기 6살 꼬마였지만 음악 학원만은 거르는 일이 없었다. 8개월쯤 개인레슨을 받던 어느 날 음반 취입 기회가 왔다.

작곡가 형씨는 “그처럼 어린 나이에 독집 음반을 내는 가수가 된다는 것은 가요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1961년 12월 3일. 하춘화는 ‘대구역 떠나는 완행 열차’등 민요풍 노래 8곡을 담은 10인치 LP <하춘화 가요앨범>을 발표했다. 반주와 동시에 노래를 녹음하는 시대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저는 금년 7살 된 하춘화 입니다”라며 대사까지 잘 해냈다. 소식을 전해들은 연예 협회 가수 분과는 그녀에게 회원증을 증정했다. 국내 최연소인 만 6살짜리 독집 음반 가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오른 첫 무대는 시공관이었다. 관객들은 꼬마 가수의 등장에 술렁거렸다. 하춘화는 “그때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에 없고 요란했던 박수 소리만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시공관 첫 무대의 에피소드 하나. 공연이 끝날 무렵 모든 가수가 함께 무대에 나가 인사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쿵’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나이에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졸던 하춘화가 무대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 공연은 잠시 중단되었고 무대와 객석에선 폭소가 터졌다.

그녀의 노래가 첫 방송을 탄 것은 시공관 무대에 오른 지 3년여가 지난 65년 2월 3일 MBC 라디오의 <가요 1번지>를 통해서 였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뛸 듯이 기뻐했지만 노래를 소개한 아나운서는 “이렇게 어린 아이까지 노래를 시키다니 한심한 세상”이라고 비꼬았다. 부친은 이 같은 비난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꼬마 가수의 출현은 가요계의 큰 화제였고, 극장 쇼 무대 매니저들로 그녀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박재란, 송민도, 이미자 등 당시 쟁쟁했던 인기 가수들과 함께 공연 길에 올랐다. 이미자는 늦은 밤 다른 공연장으로 이동할 때 잠든 그녀를 업고 가기도 했다. 고된 쇼 무대였지만 꼬마 가수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녀는 같은 또래의 김영환, 김태영과 함께 <하춘화와 삼남매 쇼>를 구성해 전국을 누볐다. 가는 곳마다 ‘천재 꼬마들’이란 찬사가 쏟아졌다. 그녀를 보러 온 인파로 극장의 유리창이 깨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영화 주제가 <아빠 돌아오세요>를 부른 것이 인연?돼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 미도파레코드 사장 임정수씨는 ‘다음 가요계의 주역’이라는 확신이 들자, 하춘화에게 5년 장기 전속을 제의했다. 영화 출연 이후 3년 간 활동해온 삼남매 팀을 해체한 그녀는 솔로로 나섰다. 하지만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65년 에는 삼천포의 한 여관에서 도금봉, 이미자와 함께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녀는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68년 정화여중에 입학한 그녀는 농구 대표 선수로 활약하면서 중3 땐 반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이 무렵 지구레코드로 온 작곡가 고봉산씨와 함께 가끔 신곡을 취입했지만, “어린 나이에 무슨 가요를 하느냐”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늘 머리를 숙여야 했다.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 바둑을 잘하는 아이들은 신동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대중가요를 부르는 자신에겐 비난을 퍼붓는 사회 분위기에 어린 하춘화는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3-10-02 15:13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