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씨 외교…"실리추구" 자평 불구, 여론 '빈손외교' 비난 봇물

"무엇하러 다녀오셨나요"
노무현씨 외교…"실리추구" 자평 불구, 여론 '빈손외교' 비난 봇물

노무현식 외교는 과연 몇점짜리일까? 노 대통령의 방미ㆍ방일 외교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가장 궁금한 점이다. 실리추구를 위한 실용적 외교였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가 하면 굴욕외교에다 초보외교라는 혹평도 제기된다.

여기에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은 ‘등신외교’라는 막말을 섞어가며 극렬 비난해 논란을 불렀다. 정부 정책에 대해 찬반은 당연한 일이지만 ‘노무현식 코드’가 외교 부문에서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는데 우선 관심이 간다.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친노(親盧) 지지층부터 그의 외교를 평가 절하하는데 앞장서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그간 반노(反盧)에 앞장섰던 보수계열에서 칭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한나라당에서도 이례적으로 노 대통령의 방미 외교를 환영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노 대통령의 친미 행태를 굴욕적 외교로 규정하고, ‘배신’이나 ‘변절’ 등 극한 용어를 동원하면서 깎아 내렸다. 반노가 칭찬하고 친노가 등을 돌린 역설적인 상황에서 진행된 일본 방문은 노 대통령으로서는 진정한 외교 능력을 평가 받는 중요한 무대였다.

3박4일간의 방일 이후 노 대통령은 청와대 보좌관 회의에서 “국가와 국민의 대표로서 부끄럽지 않게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고, 청와대 측도 ‘실사구시’란 용어를 써가며 “한일 외교의 새장을 연 실리추구 외교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자평에 대해 여론의 반응은 대체로 따가운 편이다. 반노 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친노파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노 대통령의 외교 성적에 박한 점수를 주고 있다. 호의적 평가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일본 순방

노 대통령의 방일은 시작 전부터 여기저기서 문제점이 노출됐다. 방일 날짜가 하필이면 6월6일 현충일이란 점과 시기 조정이 아키히토 천황의 스케줄에 맞춰 결정됐다는 것. 또 방일 직전에 이뤄진 유사(有事)법제의 일본 참의원 통과와 아소 다로 자민당 정조회장의 ‘창씨 개명’ 망언이 맞물리면서 일각에서는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일본을 갈 필요가 있느냐”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그렇지만 예정된 국빈방문이었고 북핵 위기와 경제 문제 등 현안이 당면해 있어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일본 지도자들이 이런 외교적 결례에 대한 사과나 과거사에 대한 ‘톤’ 높은 언급 등이 있을 것이란 기대도 포함됐다. 그러나 막상 노 대통령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이런 기대는 사라지게 됐다.

고이즈미 총리는 창씨개명과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에 상응할 만한 다른 ‘당근’이라도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 같이 ‘밑지게’ 된 상황은 노 대통령이 스스로 부추긴 측면도 있다.

노 대통령은 방일 내내 “과거사 언급은 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왔다”고 강조한 뒤 북핵과 미래의 동북아 공동체 문제에만 매달렸다. 그러다 방일 마지막 날 일본 국회연설에서 일본내 방위안보법제와 평화헌법 개정 논의에 대해 “불안과 의혹이 겹치는 심경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슬쩍 언급했다.

과거 문제를 꺼내지 않겠다고 하다가 태도를 바꾼 것인데 일본 측이 과연 이를 심각히 받아들이겠는가. 결국 양국 공동성명에 ‘과거 직시’라는 표현만 있을 뿐 반성하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북아 공동체 문제는 이미 고이즈미 총리가 언급한 사안인 데다 미국의 견제로 인해 당장 구체화하기에는 힘든 분야다. 별반 소득도 없었다.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평화적 해결 원칙을 재확인하는 선에 머물렀다. 오히려 고이즈미 총리는 대화보다는 대북 압력에 무게를 둔 듯한 미국 입장 편에 섰다.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와 북핵 문제의 공조에 비중을 둔 노 대통령 외교는 일본 과거사와 유사법제 처리 문제에 소극적 대응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노련한 일본 외교팀에 노 대통령의 일행이 갈피를 못 잡고 빈손으로 귀국한 셈으로 귀결됐다.


청와대, “실사구시 외교” 강조

청와대 측은 줄기차게 이번 방일은 실사구시를 위한 실리외교임을 강조하고 있다. 실사구시라면 실제 국가에 대한 이득이 가시화되는 것을 말하는데, 앞서 언급한 하드웨어 적인 국제 문제에서 소득이 없었다면 소프트웨어 적인 부분에서는 뭔가 얻어낸 것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도 적자투성이 계산서다.

노 대통령은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일본입국 비자 면제, 재일동포의 지방 참정권 확보 및 대한(對韓) 투자유치 등을 요구했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할 만한 성과가 없었다. “적극 검토하겠다”는 수준의 답변을 얻어낸 것이 유일한 소득이랄까.

대신 우리는 일본에게 문화의 추가 개방이란 선물을 안겨줬다. ‘메이드 인 재팬’의 영화 가요 애니메이션 등이 봇물처럼 국내로 밀려들게 됐다.

여기에다 노 대통령의 외교적 관례를 넘어선 신중치 못한 발언이 국내외적으로 또다시 쟁점거리로 등장했다. 노 대통령은 가까운 나라를 일본-중국-미국 순으로 꼽았다. 미국 방문 당시 적극적인 친미 언행을 보인 것과 상당부분 거리가 있는 것으로 미국 측에서 노 대통령의 외교적 일관성에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한 발언이다.

또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과의 회동에서는 공산당이 허용될 때 완전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연히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경악과 충격이란 성명을 내고 대통령 탄핵소추 이야기까지 꺼냈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덕담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감안하면 도를 넘어선 언행이란 지적이 대부분이다.

노 대통령의 방일 이후 한나라당과 자민련 등 야당은 방미 때와는 달리 연일 악평을 쏟아냈다. 노 대통령의 방미는 소원해진 한미관계의 복원과 북핵 문제에 대한 당사자간 협의, 외국인 투자 확대 등 현안에 대한 소득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채 내외부 분란만 조성한 ‘0점 외교’라는 것이다. 혹평대열에는 민주당 친노파 의원들도 가세했다.


국회서도 "저자세 외교"한 목소리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실속없이 치러진 정상회담’이라고 정의했다. 추 의원은 “일본은 햇볕정책의 지지를 철회하고 대북 압박정책으로 방향전환한 것을 알 수 있는데도 노 대통령은 아무런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며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 의회에서도 햇볕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지만 우리의 확고부동한 외교철학 부재가 일본 입장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추 의원은 이승만 정권시절을 예로 들어 “경제적으로 최빈국이고 지정학적으로 사면초가 상태였지만 외교적으로 항상 당당했다”며 “우리 정책을 통해 입장을 지키겠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이 없다면 상대도 이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았다.

같은 당 유재건 의원도 국회 대정부 질의 원고에서 “일본은 노 대통령 도착 8시간 전에 유사법제 관련 법안을 통과시켜 놀라게 했다”며 “외교부는 그런 정보를 언제 획득했고 어떤 조치를 취했느냐”고 따졌고, 김성호 의원도 질의 원고에서 “일본의 이중적 외교결례에도 불구하고 일본 방문 일정을 조정하지 않은 것은 저자세 외교를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고 쏘아 붙였다.

지난 정권에서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낸 한나라당 한승수 의원은 “신용을 중시하는 미국은 한번 펑크가 나면 평생 적색거래자로 찍혀 대출 한번 받을 수 없다“며 “노 대통령이 가까운 나라를 일본-중국-미국 순으로 꼽은 점은 미국 측에서 한국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꾀한다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일본 국민도 식민지배를 당했던 한국의 대통령이 발언한 ‘일본 우선’ 부분을 과연 진실이라고 믿겠느냐”고 덧붙였다. 무엇을 위한 방일 외교였는지, 어떤 소득이 있었는 방일이었는지 정말 묻고싶다.

염영남기자


입력시간 : 2003-10-02 15:18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