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북에 오른 공연기록 대중음악 학교 설립 꿈

[추억의 LP여행] 하춘하(下)
기네스북에 오른 공연기록 대중음악 학교 설립 꿈

소녀로 성장한 하춘화는 별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극장 쇼와 학교 생활을 병행하는 고생스런 시절을 한동안 보냈다. 히트 곡이 없는 가수는 천덕꾸러기일 뿐이었다. 데뷔 10년이 넘는 가수였건만, 무대에서건 분장실에서건 3류 가수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곡가 고봉산이 지구레코드로 왔다. 그는 이용일이 작사를 한 ‘물새 한 마리’란 노래를 하춘화에게 줬다. ‘갈 곳이 없어서 홀로 서 있나/날 저문 호숫가에 물새 한 마리’라는 가사 내용은 마치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 애착을 갖고 1971년 1월에 발표를 했다.

앳된 목소리지만 오랜 무명 가수의 설움이 짙게 배인 절절한 목소리로 노래한 ‘물새 한 마리’는 부산에서부터 반응이 나왔다. 음반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 나자 레코드 도매상들이 음반사에 “이 여가수가 누구냐?”고 문의를 해왔다.

삼남매 쇼로 극장무대를 주름잡던 천재꼬마가수가 하춘화임이 알려진 것이 바로 그때다. 10년이 지났다고 해도 그녀는 겨우 16세의 여고 2학년이었다. 갑작스런 유명세에 재학 중이던 서울실업여고측은 우려를 표명했으나, 그녀는 연예활동 허락을 얻어내 자신의 대표 곡이 된 민요풍의 ‘잘했군 잘했어’를 71년 말에 발표했다.

이 곡은 62년 송춘희에 의해 처음 발표되어 싱얼롱의 개척자 전석환에 의해 ‘다함께 노래부르기’때 사용되었던 곡이다. 고봉산은 멜로디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 리바이벌을 했다. 상상외의 빅히트로 무명의 설움을 날려버린 그녀는 꽃송이 같은 매력의 가수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영감!’, ‘왜 불러?’로 주고받는 대화식 노랫말은 당시 사회에 신 유행어로 등장했다. 발매 6개월만에 15만장을 돌파하며 빅히트의 명예전당에 올려졌다. 하춘화는 지구레코드에서 코로나 자동차를 선사할 만큼 전성기를 맞았다.

이미자는 “크게 대성할 내 후계자”라고 추켜 세웠다. 한국연예개발협회도 그녀를 ‘9월의 가수’로 선정했다. 이어 72년 TBC주최 제8회 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부문 수상에 이어 MBC 10대 가수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녀는 ‘연포 아가씨’, ‘영암 아리랑’ 등 잇단 히트 퍼레이드로 정상의 가수로 떠올랐다. 72년 11월에는 포크가수 김세환과 함께 예그린 악단의 뮤지컬 ‘우리 여기 있다’에 여주인공으로 발탁됐고 톱 스타 남진과 함께 영화 ‘세노야 세노야’의 여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멀티엔터테이너의 가능성을 확인한 셈. 73년 2월 TBC 고전해학극 ‘여보 정선달’에 주연으로 발탁돼 명창 이은관과 열연하면서 그녀의 ‘끼’는 절정에 달했다.

하춘화는 데뷔 13년 74년 5월 아세아극장에서 첫 개인 리사이틀을 가졌다. 사상 유례가 없는 3만 인파가 몰려 청계천 일대는 온통 북새통이었다. 당시 언론은 ‘불경기 속의 기적’이라고 했다. 이후 장기 지방 순회 길에 올라 반년 동안 1,500여회에 달하는 공연을 치러내는 초인적인 능력을 과시했다. 그 해 TBC 방송 가요 대상 여자가수상 3연패와 더불어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에 올랐다.

77년 11월 이리역 대 폭발 참사사건 때 삼남극장 분장실에서 쉬고 있다가 폭발의 여진으로 극장이 붕괴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그 악몽을 딛고 이리 이재민 돕기 자선쇼를 개최해 수익금 100만원을 일간스포츠에 기탁하는 등 훈훈한 미담을 만들었다. 78년 하춘화는 연예인 고소득자 랭킹 1위에 오를 만큼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경남대 부설 전문대 가정과 입학과 동시에 “공부를 계속하고 결혼 준비와 사회 봉사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인기 절정의 가수가 은퇴를 선언하자, 시중에는 ‘하춘화 분신 자살설’헛소문이 나돌 만큼 충격이었다.

대학 졸업 후 하춘화는 81년 6월 사업가 정운창씨와 결혼하며 재기했다. 2년 만에 신보를 발표하며 본격 활동에 돌입했지만, 결혼 10개월만에 파경을 맡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남북 이산 가족 고향 방문 예술단(85년 9월)의 일원으로 평양에 갔다오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시련기를 이겨 냈다.

86년 2월에는 일본 무대에 진출했다. 당시 KBS 2TV 쇼 특급에 출연한 그녀를 취재하기 위해 일본 기자와 PD 등 20여명이 내한하기도 했다.

‘한국의 미소라 히바리’라는 평을 들었던 그녀에 대한 당연한 관심이었다. 88년 귀국한 그녀는 ‘가을 바닷가’로 개인 통산 100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무대공연 부문에서도 신기원을 열었다. 91년 5월 26일 1260회의 개인공연 횟수를 돌파, 한국가수로는 처음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다.

불우 이웃을 위한 무료 공연만도 700여 회에 이르는 하춘화는 2001년 7월 청와대를 방문, 불우이웃성금 1억 5,600만원을 전달했다.

그해 10월 대중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훈장을 수상했으며 향학열 또한 대단해 2000년 8월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한국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따냈다. 6살 때 데뷔해 40여 년이 넘게 가수 활동을 해 오고 있는 하춘화는 이제 대중 음악 전문 학교 설립 등 마지막 꿈을 설계하고 있다.

입력시간 : 2003-10-02 15:42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