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입맛·기력회복에 그만

[문화 속 음식 이야기] '기차는 7시에 떠나네'의 잣죽
여름철 입맛·기력회복에 그만

“윤이 만들어주는 더운 음식들을 먹기 시작한 지가 벌써 육 년째. 마음이 들썽할 때, 누군가를 의심할 때, 태양빛에 녹아 없어지고 싶을 때, 입안에 침이 마르도록 성이 날 때…. 윤이 만들어주는 따뜻한 음식을 먹고 나면 침착해지곤 했다.” (본문 중에서)

신경숙의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는 잃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젊은 날의 기억 일부분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여인 하진. 여행에서 돌아와 조카 미란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전화를 받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행 중에 이를 이미 예감한 하진은 혼란스럽다. 미란이 있는 병원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는데 폭염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느닷없이 어떤 슬픈 느낌을 받는다. 무기력해진 하진은 ‘더운 음식’이 먹고 싶어 친구 ‘윤’에게 전화를 건다.

“너 잣죽 먹고 싶은 모양이구나?” 하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정작 본인은 그것이 ‘잣죽’이라는 사실도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데도 윤은 신기하게 알아 맞춘다. 하진의 동료이기도 한 현피디와 이혼하고 홀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윤. 하진이 찾아가자 윤은 이미 쌀을 불려놓고 잣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잃어버린 과거의 흔적찾기

윤은 더위에 지친 하진에게 차갑게 얼려둔 삼베 수건을 건넨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불린 쌀과 잣을 곱게 갈아내고, 죽을 끓이기 시작한다. 잣죽이 다 되자 윤은 물김치, 오이 피클, 소금을 곁들여 하진 앞에 내놓는다. 하진은 잣죽을 천천히 먹으며 언제나 처럼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윤은 까슬한 속치마를 내어주며 쉬어 가라고 권한다. 친구의 알 수 없는 혼란을 눈치챈 것처럼. 윤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난 하진은 ‘네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야’ 라는 쪽지를 잠든 윤에게 남긴다.

15년만에 찾아온 과거의 흔적에 내면의 술렁거림을 느낀 하진은 마침내 잃어버린 기억의 일부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단서는 스무살 무렵 자신의 모습이 담긴 낡은 사진 한 장이다. 그 사진을 찍어 주었던 과거의 다방 DJ,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 중 하나였다는 남자와의 통화, ‘은기’라는 이름과 ‘기차는 7시(원래 제목은 8시이다)에 떠나네’ 라는 노래. 이런 식으로 하진의 지난날은 조각그림이 맞춰지듯 하나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기차는...’에서 음식을 먹는 장면은 그리 자주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잣죽’은 하진이 자신의 불완전한 삶을 깨닫기 시작할 무렵에 등장하는 소재로서 의미를 갖는다. 하진은 더운 잣죽을 먹으면서 알 수 없는 슬픔을 달래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다. 마치 홍차와 마들렌 한 조각에 내면의 의식이 깨어난다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두 작품 모두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신기한 부분이다.


머리를 맑게해주고 기운을 돋아준다

‘해송자(海松子)’라고도 불리는 잣은 예로부터 ‘신선이 먹는 음식’으로 알려질 만큼 귀한 음식이었다. 각종 필수 지방산과 비타민 B, 철분 등이 풍부한 잣은 머리를 맑게 하고 기운을 돋우는 자양강장제이다.

최근에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잣은 채식주의자들에게 적절한 음식이기도 하다. 부족하기 쉬운 지방분을 보충해줄 뿐 아니라 각종 생채나 샐러드에 잣즙이나 잣 소스를 뿌리면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낸다.

각종 한과나 전통 음료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잣이지만 워낙 귀한 탓에 서너개 고명을 띄울 뿐 잣이 주 재료로 쓰이는 요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잣을 충분히 넣고 끓이는 잣죽은 알고 보면 상당히 호화로운 요리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정식에서 전채로 등장할 만큼 잣죽은 고급 음식으로 각광 받는다.

여름철에 먹는 대표적인 보양식으로 보신탕이 있다. 더울 때 차가운 음식만 먹다 보면 몸이 냉(冷)해지기 쉬운데 따뜻한 음식인 개고기를 먹어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다. 겨울에 차가운 냉면을 먹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보신탕이 맵고 자극적인 맛으로 더위를 씻어주는 반면 잣죽은 위장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 하다. 심하지 않게 땀을 송글송글 흘리며 따뜻한 잣죽 한 그릇을 먹으면 더위에 지쳤던 몸이 조금씩 기운을 회복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간단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보양식인 잣죽으로 일찍 찾아온 더위를 이겨보는 것은 어떨까?


지친 몸 회복에 좋아

이쯤해서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 비 오는 이른 새벽에 하진은 다시 한번 윤의 카페를 찾아간다. 자신을 찾는 긴 여행에 조금은 지친 것일까, 아니면 곧 알게 될 비밀이 버거워 마음을 다잡아 두고 싶은 것이었을까. 윤은 다시 그녀를 위해 ‘더운 음식’을 마련한다.

그날 윤에게도 모종의 사건-전남편인 현피디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이 일어난다. 여러 번 망설이다 그녀는 다시 죽을 끓여서 보온병에 담아 그의 병문안을 간다. 전남편과 살던 아파트 앞에서 윤은 하진에게 고백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깎아 내리지 않을 사람, 내 편인 사람을, 그런 사람을 두 사람만 가지고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그렇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지. 그 사람과 네가 있으니까.” / 나? 매번 너에게 달려와 따뜻한 음식만 먹고 가는 나.

제주도에서 옛사랑을 만나 기억을 되찾은 이후 하진은 자신의 나머지 생을 다시 시작한다. 그녀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은 ‘사랑’이다. 실연으로 자살하려 했던 조카를 목욕시켜 주고 머리를 감겨 주는 하진, 그런 하진에게 더운 음식을 준비해 주는 윤. 찢겨졌던 인생을 다시 기워내는 과정에는 아픔이 따른다.

그런 아픔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서로를 보듬어가는 정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지친 몸을 회복시켜 주는 더운 음식처럼, 아픈 상처를 감싸주는 것은 아주 오래된 친구일 것이다.

** 잣죽만드는 법
   
*재료: (4인분 기준) 쌀 1컵, 잣 1/2컵, 물 4컵, 소금 약간

*만드는 법:

1. 쌀은 씻어서 물에 2, 3시간 이상 불려 놓는다. 2. 잣은 고깔을 떼고 마른 면보자기로 닦는다. 3. 불린 쌀과 잣, 물 1컵을 부어서 간다. 4. 체에 밭쳐서 냄비에 담고 남은 찌꺼기에 나머지 물을 부어 다시 한번 곱게 갈아낸다. 5. 4를 약한 불에 올려 나무 주걱으로 서서히 저으면서 끓인다. 쌀이 엉기기 시작하면 조금씩 멍울을 풀어준다. 6. 부드럽게 끓여지면 그릇에 담고 고명으로 잣 서너개를 올린다. 소금을 곁들여 낸다.

*tip: 기호에 따라 잣을 약간 거칠게 갈면 씹히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장세진 맛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3-10-02 16:09


장세진 맛 칼럼니스트 sejinjeong@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