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까지 망쳐버린 욕심과 사치19세기 말 중국을 쥐락펴락, 부귀영화에 눈먼 여인

[역사 속 여성이야기] 서태후
나라까지 망쳐버린 욕심과 사치
19세기 말 중국을 쥐락펴락, 부귀영화에 눈먼 여인


요즘 카드 빚 때문에 몸 망치고 가정마저 파탄난 사람들 이야기를 왕왕 뉴스에서 듣는다. 명품에 눈이 멀어 인생을 망쳤거나, 너무 질탕하게 놀다가 살인자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감당도 못 할 빚을 지면서 그랬을까? 무척 그 속내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다가 문득 한 여인이 떠올랐다. 사실 요즘의 사치풍토는 이 여인에 비하면 세 발의 피일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권력과 최고의 향락을 누리기 위해 자식도 망치고 나라마저 말아먹어 버린 여인. 서태후다.


아름다운 자태, 불타는 야망

서태후(1835~1908)는 19세기 말 중국을 자기 마음대로 주물럭거린 여인이다. 19세기에, 게다가 남존여비 사상이 엄격한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8년 간 통치자였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이 시기 황실은 극심한 사치와 향락을 누렸고 그와 비례하여 중국 백성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피폐해져 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서태후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녀는 중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서태후가 권력과 조우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녀는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 청소년기를 가난 속에서 보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그녀는 애인을 버리면서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했다. 막연히 궁궐에 들어가면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꿈꾸었던 것이다.

어린 날 서태후의 꿈은 모호한 것이었지만 궁궐에 들어간 후 그 꿈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타고난 재주와 미모로 황제 함풍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태후는 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고 일약 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황제 옆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으로 서태후는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서태후의 이런 행동에 남편이자 황제인 함풍제는 그녀의 마음에 담긴 야망을 알아차리고 이를 무척 경계하였다. 그러나 함풍제는 요절로 서태후의 폭주를 막지 못하고 만다.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 그녀의 6살 난 아들이 황제(동치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자식마저 희생시킨 권력욕

수렴청정으로 온갖 권력의 맛을 다 본 서태후에게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평생 자라지 않고 어린 황제로 있어주기만 바랬던 아들이 성장한 것이다. 발을 걷어 내고 정치 현실에서 떠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불쾌한 일이었다.

게다가 성인이 된 아들은 슬슬 황제의 권위를 세우려 하고 며느리 마저 다루기가 쉽지않은 명문가의 딸이었다. 아들의 성장을 대견스러워 해야 할 어머니로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될 생각이 그녀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권력욕 앞에서는 아들이든 아니든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였다. 더불어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한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의 손에 이끌려 홍등가에 드나든다. 열락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황제는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린다.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서태후에게 동치제는 이미 아들이라기 보다는 권력 다툼의 라이벌이었다. 서태후는 동치제를 고통 속에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도록 만든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의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손자라는 애틋한 마음보다는 미래의 경쟁자이기에 없애버려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멈출 줄 모르는 극단적인 사치와 향락

권력 앞에 모성애 마저 버린 비정한 어머니, 서태후는 3살, 4살의 어린 아이를 황제로 내세워 수렴 청정을 이어간다. 3살의 아이가 성인이 되면 어김없이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황제의 모후라는 위치에 있으면서 실제적인 통치자였다.

27살에 젊은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인다. 영록은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다. 서태후는 영록 이외에도 마음이 내키면 아무나 상대하는 방종까지도 일삼았다고 한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끼에 128가지나 되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100만냥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치의 끼니에 해당하였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고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으며,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팔찌, 비취반지 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 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 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짓게 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도 오로지 처소 꾸미기에 급급했던 서태후의 배짱은 크다면 크고 황당하다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고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


서태후와 청나라

끝없는 사치 속에서 살아가던 서태후에게도 마지막은 있었다.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고 서태후는 이질에 걸려 세상을 등진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청조도 곧이어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서태후가 만든 보수적인 정치 풍토는 새롭게 다가드는 서구 세력에 순발력있게 대응하지 못했고, 황실과 주변 귀족의 사치와 향락은 백성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서태후 사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중국은 서구열강의 손아귀에서 농락 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잘못된 욕망의 끝은?

종종 사치향락과 부귀영화가 어떻게 다른가 구별이 잘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서태후가 애초에 궁궐에 들어가면서 바랬던 것은 부귀영화였다. 그런데 그녀는 사치와 향락에 몸을 맡겨 자신과 가족을 망치고 나라까지도 망쳐 버렸다.

서태후의 생을 보면서 스스로의 명예와 자존을 망치고 타인을 욕망의 희생물로 삼으면서 누리는 부귀영화는 사치와 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요즘 우리들이 하고 있는 소비행태도 간혹 사치와 향락인지 부귀영화인지 그 경계가 참 모호할 때가 많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3-10-02 16:42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