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과 북한강이 몸을 섞는 물길, 뛰어난 풍광 자랑

[주말이 즐겁다] 팔당호 드라이브
남한강과 북한강이 몸을 섞는 물길, 뛰어난 풍광 자랑

우리나라의 가장 큰 젖줄인 남한강과 북한강, 두 강줄기를 모두 품고 있는 팔당호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바로 두물머리(兩水里). 한 물길은 강원도 북녘 땅 금강산(1,638m) 기슭에서 시작해 휴전선 넘어와 북한강으로, 다른 물길은 태백 금대봉(1,418m) 자락의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해 남한강으로 흐르다 이곳서 몸을 섞으며 잠시 숨을 고른다.

조상들은 물이 차갑고 물살이 거세며 물빛이 푸르른 북한강은 ‘숫물’이요, 따뜻하고 순하며 붉은 남한강은 ‘암물’이라 하여 두물머리에서의 어우러짐을 음양의 조화로 설명했다.


두물머리 느티나무가 들려주는 전설

두물머리엔 전설처럼 늙은 느티나무가 서있다. 400년쯤 전부터 이곳에 뿌리박고, 남한강이나 북한강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오가던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쉼터 역할을 하던 나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 ‘도당 할아버지’라 부르며, 매년 가을 젯상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제를 지낸다.

도당 할아버지의 배필이었던 ‘도당 할머니’는 1974년 팔당호가 생길 때 수장되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현재 홀몸이다.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 서있는 이곳의 풍광이 제법 운치가 있어서인지 신혼부부들의 야외촬영장이 되기도 하고, 영화나 드라마, CF 촬영 등의 장소로도 자주 이용될 만큼 사랑을 받고 있다.

두물머리가 남한강과 북한강의 속삭임을 곁에서 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북한강 건너에 솟은 운길산(610m)의 수종사(水鍾寺)는 두물머리 풍광을 한눈에 담고 있는 절집.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물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때는 조선시대인 1458년. 악성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는 금강산에서 요양하고 돌아가는 길에 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한밤중에 이상한 종소리를 들은 세조는 이튿날 그 출처를 찾아보게 하였는데, 뜻밖에도 강 건너 운길산 바위굴 속의 물방울이 떨어지며 나는 소리였다. 굴속엔 18나한상도 모셔져 있었다. 세조는 이곳에 절을 짓고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당연히 석간수는 이 절집의 보배가 되었다.

그후 물맛이 알려져 내로라 하는 차인(茶人)들의 발길이 잦았는데, 능내리 마현마을에 살던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젊은 시절 이곳을 자주 찾았다 한다. 또 조선 후기 차의 대가인 초의선사도 한양에 올 때면 수종사에 들러 다산과 우정을 이어갔다. 절집에서 마련한 찻집인 삼정헌에서 차 한 잔 들며 창밖으로 펼쳐지는 한강 풍광을 바라보는 운치가 제법이다. 수종사~운길산 정상 코스는 왕복 1시간쯤 걸린다.

팔당호를 찾았다면 마현마을에 있는 다산의 생가와 묘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2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다산 영정이 나그네를 반기는 다산기념관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등 다산의 실학사상이 담긴 저서와 다산이 직접 그린 서화가 전시되어 있다.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 사용하였던 거중기 모형에선 당시의 건축기술 수준을 살필 수 있다. 또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머물던 다산초당 등도 모형으로 꾸며놓아 팔당호 호숫가에서 다산의 강진 18년 유배생활도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은 새로 복원한 탓에 고풍스런 맛을 느낄 순 없지만 오랜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다산이 마음을 다잡고 여생을 학문에 몰두하던 분위기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다산의 유년기 놀이터요, 말년의 휴식처였을 생가 뒷동산에 자리한 다산의 묘는 실사구시를 표방했던 그의 학구열을 되새겨보며 한강 물줄기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푸른빛 감도는 조선 백자 굽던 분원마을

수도권에 있었던 덕에 여느 호수보다 역사적인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팔당호. 그래서 들를 곳이 제법 많지만 이 마현마을에서 호수 남쪽의 소내섬 너머로 보이는 광주시 분원마을도 놓칠 수 없는 곳이다. 지금은 수몰되어 섬으로 바뀐 소내섬은 옛날 동대문 밖에서는 가장 컸다는 우시장 자리였다. 우천이란 이름도 소(牛)가 모이는 내(川)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소내섬을 포함한 분원마을은 조선시대 백자를 굽던 도자기 마을로 이름이 높았다. 이곳엔 조선시대 궁중으로 들어가는 그릇을 굽던 ‘사옹원’이 있었다. 세종 때는 광주 분원이 중앙관요로 승격되어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었으며, 조선 중기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순백의 백자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흙의 질이 좋고 하루면 한양까지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뱃길도 편했기 때문이다. 모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진품명품’이라는 코너엔 가끔 분원마을의 백자가 등장해 수천만원 호가하면서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요즘도 웬만한 집에선 마당만 파도 도자기 파편들이 쏟아질 정도라고 한다. 허나 모두 옛 영화일 뿐, 지금은 외로운 기념비만이 당시의 명성을 증거하고 있다.


▲ 교통= 서울→6번 국도(양평 방향)→팔당대교→1km→다산 정약용 유적지 이정표(우회전)→5km→마현마을. 이곳서 승용차로 10여분 거리에 수종사와 두물머리(양수리)가 있다. 팔당댐 삼거리→45번 국도(광주 방향)→7km→도마리 삼거리(좌회전)→88번 지방도→3km→광동리 사거리(좌회전)→3km→분원마을.


▲ 숙식= 팔당호 주변엔 운치 있는 카페와 식당 등이 즐비하다. 마현마을엔 황토마당집 등 민물고기 매운탕을 내놓는 식당이 많다. 두물머리 입구에도 식당들이 많이 몰려 있다. 백자 굽던 분원마을은 팔당호가 생기면서 붕어찜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해 지금은 30여곳이 성업중이다. 팔당호에서 잡은 참붕어에 대추 인삼 등을 넣고 조려내 비린내를 없애고 졸깃졸깃한 맛을 잘 살렸다.

민병준 여행작가


입력시간 : 2003-10-02 17:22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