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만들어 낸 한국식 찹살 바게트와 두 부부의 로맨스

[문화 속 음식 이야기] '주노명 베이커리'
상상력이 만들어 낸 한국식 찹살 바게트와 두 부부의 로맨스

요즘 제과점에서 잘 팔리는 메뉴 중 하나로 ‘찹쌀 바게트’가 있다. 바게트를 반으로 갈라 그 안에 찹쌀 반죽과 팥을 채워넣은 것이다. 바게트의 본고장인 프랑스 사람들이 와서 본다면 기겁할 노릇이지만 한국인의 입맛에는 제법 잘 맞는다. 특히 기존의 바게트 맛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에게는 달콤한 팥앙금과 쫀득한 질감이 떡을 먹는 듯한 기분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외국 음식 중 가장 한국적으로 변모한 것은 ‘빵’이 아닐까 싶다. 단팥빵, 소보로빵 등 많은 빵들이 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이다.

뿐만 아니라 마늘빵에는 설탕을 듬뿍 뿌려 놓았고 피자빵에는 게맛살이 들어간다. 한국의 빵들이 이처럼 ‘국적불명’이 된 원인은, 초창기의 빵이 직수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을 한번 거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 문물을 무엇이든 자국의 것으로 변형해버리는 일본인들이기에 구한말에 들어온 빵들 자체가 ‘오리지널’과는 이미 거리가 멀었다.

그 후 진한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취향에 맞춰 다시 한번 변화를 거친다. 그 결과, 태생이 같았던 서구의 빵과 한국식 빵은 완전히 다른 종류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정통 서구식 제과점이 늘어나고 베이글이나 크로와상 같은 빵들이 낯설지 않게 된 요즘도 ‘달디 단’ 한국식 빵들은 여전히 빵집 한 구석에 건재해 있다.

빵을 소재로 한 영화, ‘주노명 베이커리’는 바로 한국식 찹쌀 바게트를 연상시키는 영화이다. 첫째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빵’이 그렇고, 스와핑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웃음과 가족주의로 버무린 점이 ‘한국식 빵’을 만들어낸 제빵사들의 상상력과 닮아 있다.


불륜같지 않은 불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건 빵집.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을 듯한 남자 주노명(최민수)에게 고민이 생겼다. 언제부턴가 아내 한정희(황신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는 아내를 기쁘게 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소용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삼류 소설가 박무석(여균동)이 드나들면서 아내의 한숨은 콧노래로 바뀌는데…. 주노명은 은근히 질투가 나면서도 아내의 미소가 사라질까 두려워 이들의 ‘불륜’을 사실상 인정하게 되고, 박무석이 빵집을 찾을 때마다 세 사람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한편 무석의 아내이자 억척스런 보험설계사인 이해숙(이미연)은 먹지도 않는 빵을 매일 사오는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상한 빵을 남편에게 강제로 먹일 정도로 화가 난 해숙은 마침내 그에게 금족령을 내린다. 무석이 빵집에 나타나지 않자 정희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지고, 급기야 주노명은 자신이 직접 해숙을 설득하러 나선다.

차갑기만 한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는 혼신을 다해 케이크를 굽는다. 해숙의 매서운 발길질을 상기시키듯, 구두 모양으로 만든 케이크를 비롯해 정성이 들어간 그의 케이크는 얼어붙어 있던 해숙의 마음을 서서히 녹여간다. 마침내 해숙은 남편의 빵집 출입을 허락해주고 그 싫어하던 빵으로 남편에게 간식을 만들어주는 변화까지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좋았을 것을, 주노명과 해숙 사이에 예기치 않은 로맨스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주노명 베이커리’의 배경이 되는 빵집은 말 그대로 ‘동네 빵집’이다. 그 곳에서 팔고 있는 빵들 역시 전문적이거나 화려하지 않다. 이름도 못 들어본 서양식 빵 대신 마늘빵, 소보로빵 등 친숙한 빵들만이 등장한다. 때문에 전문적인 제빵을 다룬 영화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영화 속 빵들의 소박함은 그들 네 사람을 닮았다.

동네 빵집 주인과 주부, 삼류 소설가와 보험설계사. 이들은 뜨겁고 낭만적인 사랑을 할 만큼 젊거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아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 ㎲毁낮?주인공들 역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적절한 웃음으로 커버한 것도 눈에 띄는 점이다. ‘불륜’을 소재로 한 영화는 흔히 어두운 결말을 빚어낸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언페이스풀’처럼 끔찍하지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가슴 아프지도 않다.

두 부부가 서로의 불륜을 용인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황당하지만 결국은 배우자를 위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설정은 ‘불륜’이라는 어두운 느낌을 상당 부분 걷어낸다. 더불어 빵집의 따뜻한 느낌과 여균동의 코믹 연기도 ‘주노명 베이커리’를 불륜 영화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부분이다.


촌스러운 사랑놀음

그러나 제대로 된 빵맛을 보기 원하는 이들에게 이상야릇한 찹쌀 바게트가 마음에 들지 않듯이, 이 영화도 세련미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금지된 사랑이 주는 짜릿함과 그 사랑이 끝났을 때의 씁쓸한 느낌. 그런 것들은 때로 관객에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애정 영화에 있어서는 핵심과도 같다.

‘주노명 베이커리’에는 바로 이러한 점들이 결여된 채 시종일관 달콤함만을 내세운다. 밤만주나 카스테라를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도 한 두개 먹으면 질리듯이, 지나치게 ‘닭살스러운’ 사랑 얘기도 처음에는 귀엽지만 나중에는 속이 느글거리게 만든다.

마냥 웃음으로 일관하던 영화가 마지막에는 그 톤이 바뀐다. 그리고 ‘원나잇 스탠드’처럼 각자 파트너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것인가를 관객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든다. 감독이 고육책으로 생각해낸 듯한 에피소드는 결혼 50주년을 맞은 단골 손님의 웨딩케이크 주문이다.

뒤늦게 케이크를 만들어 찾아간 주노명은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혼자 남은 할머니를 보며 50년 동안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주노명과 이해숙, 한정희와 박무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의 위치로 돌아간다.

결혼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상투적 내용이 소위 ‘한국적 정서’에는 더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처음부터 ‘스와핑’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보람이 없지 않은가. 불륜으로 시작했다가 그래도 역시 가족이 중요하다는 결론은 기름기 많은 도너츠처럼 깔끔하지 못한 뒷맛을 남겨준다.

격식을 파괴한 찹쌀 바게트가 맛은 있을지언정 세련된 느낌을 주지는 못하는 것처럼, 어정쩡하게 마무리한 불륜 영화도 관객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겠지만 완성도에서 약점을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입력시간 : 2003-10-0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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