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횡포에 굴복 안한다"결연, '언론에 떠넘기기' 비판도

노무현의 '언론전쟁' 제2라운드
"언론횡포에 굴복 안한다"결연, '언론에 떠넘기기' 비판도

노무현 대통령이 8월2일 참석한 ‘참여정부 국정토론회’는 더 이상 국정과 관련한 정부 측의 대 토론회 장소가 아니었다. 서두부터 쏟아져 나온 노 대통령의 대 언론 불만 발언으로 회의장은 곧바로 언론과의 결전을 앞둔 출정식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일부에서 대 언론 협력론을 펴기도 했지만 노 대통령은 묵살했고 당연히 전체 분위기는 ‘역사의 중죄(?)를 짓는 언론과의 한판 전쟁’으로 흘렀다. 마치 전장에 나서는 전사들의 비장함 같은 기운을 느낄 정도였다.

양길승 청와대 제1부속실장의 청주 향응 사건이 왜 언론과의 전쟁으로 바뀌어야 하는지, 참여정부의 가장 큰 적이 왜 언론으로 귀결돼야 하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는 않지만 하여간 노 대통령을 포함한 국무위원들은 이 자리에서 앞다퉈 최근의 언론행태를 극렬 비난하고 나섰다. 양 실장의 공무원 윤리강령을 어긴 향응 사건이 정부의 ‘언론과의 전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盧, 양 실장 사표수리 불가

노 대통령은 양길승 부속실장과 관련, “별로 자랑할 일이 아니고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경질하지 않으면) 후속 보도가 나와 청와대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권고 때문에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이유가 그것이라면 수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진상을 밝히고 해도 되는데 언론 때문에 후속기사가 두려워 아랫사람 목 자르고 싶지는 않다”며 “절차를 밟는 것 때문에 그 사람에게 더 큰 피해가 가는 가혹한 결과가 될 지 몰라도 절차적으로 보호할 것은 보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의 말을 종합해 보면 언론 보도가 두려워 부하 직원을 문책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뒤집어보면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 때문에 국가 동량이 희생되는 상황이기에 대통령이 나서서 감싸야 한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양 실장 향응 파문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번 사건이 언론 탓에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야당과 언론의 고의성 짙은 합작품이란 말인가.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양 실장 향응 파문에 대해 계속 조사를 벌이고 있고 청주지검은 이 사건의 몰카(몰래카메라) 부분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벌써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동창인 정화삼씨가 합석했던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정씨는 골프공 제조업체의 임원으로 청주 공장의 책임자이다.

이 사건이 일각에서 제기되는 지역 조직폭력배가 연루된 이권다툼이거나 집권세력 내부의 양 실장 반대파들의 견제행위, 그것도 아니면 또다른 세력의 정치적 음모인 지 조만간 실체가 수면 위로 부상할 태세다.

양 실장도 최근 언론과의 통화에서 “정치의 세계가 이런 것인 줄 몰랐고 다시는 정치권에 기웃거리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노 대통령이 사표를 빨리 수리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노 대통령은 ‘언론때문에…’란 특유의 해법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음모 여부를 떠나 국가 공복(公僕)이 수백만원대의 향응을 받아 참여정부가 만든 윤리강령을 스스로 위반했고, 그로 인해 정국이 떠들썩 해진 상황이 골자다. 누구의 말처럼 언론 때문에 없었던 사건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음모에 의해 인재가 희생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


盧, 언론횡포(?)에 맞설 용기 주문

노 대통령의 언론 불만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8월2일 국정토론회에서 밝힌 수위는 그 정도가 과거와는 분명 달랐다. 노 대통령은 이날 “부당하게 짓밟고 항의한다고 더 밟고 맛볼래 하며 가족 뒷조사하고 집중적으로 조지는 횡포를 용납할 수 없다”며 “이 횡포에 맞설 용기가 없으면 그만두라”고 주문했다.

노 대통령은 또 “언론과의 갈등은 국회의원이 되기 전 소외된 사람 약자를 좇아다니던 시기, 사실을 전부 왜곡시킨 데서 시작됐다”며 “문귀동 성추행 사건 당시 정부와 언론 발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그때부터 (반감이) 싹터왔다”고 설명했다.

이어진 분임토론회에서 노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기자에게 술 밥을 사란 말인가… 언론인 중에 질 안 좋은 사람이 많고…” 등의 심한 발언도 잇따랐다.

대통령이 언론에 대해 공격적인 불만을 마구 털어놓는데 장ㆍ차관 등 참석자들도 충성경쟁이라도 벌이듯 대 언론 성토를 앞다퉈 내놓았다. 변재일 정통부 차관이 “기자에 대한 청탁이 아닌 이해와 협조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언론과의 협력론을 제기했으나 노 대통령의 일갈(一喝)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최영진 외교안보연구원장은 “기자의 사무실 출입과 가판, 기자접촉과 접대는 없어져야 한다”며 “어느 차관은 비맞으며 기사를 빼기위해 나갔고 장관은 목을 빼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을 봤다”고 비난했다. 변양균 예산처 차관은 “당사자가 (언론상대로) 소송하기 힘드니 국정홍보처의 지원팀이 법적으로 뒷받침해 달라”고 문광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주무 장관인 이창동 문광부장관은 “언론중재위에 언론피해구제센터를 만들고 언론을 스크린하며 바로 잡는 옴부즈맨제도도 실시하겠다”고 구체적인 안을 내놓았다.

이날 이후 공정거래위원회관계자는 8월3일 “신문시장 조사 주관업체를 통해 전국 200곳 가량의 표본지역을 선정, 40일간 불공정행위를 본격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의 국정토론회장의 발언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현 정부의 어떤 국정 현안보다도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되는 느낌이다.

이번 사건을 보는 국민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분명 양길승 실장의 향응 파문이 문제가 됐고, 그 윤리강령을 어긴 상황이 실증 자료격인 카메라에 담겨 전국에 보도돼 양 실장은 사표를 제출해 놓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언론과의 전쟁이 선포되고 언론에 대한 제동장치 마련이 사태의 본질처럼 호도되고 있는 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한 예를 들어보자. 책상 위에 꽃병이 있고 누군가 이를 잘못 건드려 병이 깨졌다고 하자. 대부분은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하지만 극히 일부(특히 요즘 젊은 세대가 그런 경향이 많은 것 같다)는 “누가 이 병을 책상 위에 놓았는가”를 먼저 탓한다. 노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향이 후자 같은 방식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 2003-10-05 15:53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