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익혀댄 닭고기

[문화 속 음식이야기] 영화 '집으로…' 백숙
사랑으로 익혀댄 닭고기

“켄터키 치킨 달라고 했지, 누가 이런 거 달라고 했어?”

도시 아이와 시골 할머니의 생각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한마디는, 영화 <집으로…>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사 중 하나였다. 이 영화가 단순히 시골생활에 대한 향수를 그려낸 것이었다면 그저 진부한 복고풍 영화 중 하나로 그쳤을지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외할머니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감독의 말처럼 <집으로…>는 어린 시절 말이 안 통한다고 답답해 하기도 했을, 하지만 언제나 말없는 정을 느끼게 하는 외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철없고 때로는 공격적인 아이인 상우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바로 아주 오래 전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7살 꼬마 상우는 엄마가 직장을 잃게 되자 산골 외할머니의 집에 맡겨진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에게는 권태롭기만 한 생활의 시작이다. TV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화장실은 밤에 가기 무서울 정도로 깜깜한 바깥에 있다. 유일한 낙이 되어 주던 전자오락기의 건전지가 떨어져서 온 동네를 헤매지만 도시에서는 흔하디 흔한 건전지가 이곳에는 없다.

더구나 함께 지내게 된 외할머니는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그래서 말벗이 되어줄 수도 없는 사람이다. 무료한 생활에 짜증이 난 상우는 외할머니에게 심술을 부리지만 웬일인지 할머니는 버릇없는 손자를 나무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켄터키치킨이 아니잖아" 울음

두 사람은 한 집에서 마치 남처럼 살아간다. 식사 시간에도 할머니와 손자가 먹는 음식은 다르다. 산나물에 꽁보리밥을 먹고 있는 할머니 옆에서 상우는 엄마가 챙겨준 스팸과 콜라로 ‘연명’한다. 그러던 어느날, 상우는 켄터키 치킨을 만들어 달라며 할머니에게 손짓 발짓을 섞어 그것이 닭고기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상우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할머니는 장대비를 맞아가며 살아있는 닭 한 마리를 사가지고 돌아와 직접 요리를 한다. 그런데 잔뜩 기대를 하고 있던 상우 앞에 놓여진 것은 바삭하게 튀겨낸 치킨이 아니라 희멀건 국물 속에 담긴 닭고기 백숙이었다. 상우는 실망하여 울음을 터뜨린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에게는 닭고기라는 이름보다는 ‘치킨’이, 그것도 미국의 주 이름을 딴 ‘켄터키 치킨’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다. 패스트푸드의 맛에 길들여진 아이는 닭고기가 곧 튀긴 닭이라는 고정 관념을 무의식 중에 갖게 된다.

반면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받지 못하고 살아온 할머니는 닭고기 하면 푹 끓여낸 백숙을 떠올린다. 화가 나서 상을 돌아보지도 않고 잠든 상우는 배가 고파 깨어났다가 그제서야 냄비 속의 닭을 한입씩 맛보기 시작한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맛있게 백숙을 먹어치운 상우는 동시에 조금씩 할머니를 향해 마음을 열어간다.

상우가 치킨이 아닌 ‘백숙’ 맛을 알게 된 이유가 단지 배가 고파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패스트푸드점의 치킨은 기름에 튀겨내고 조미료를 썼기 때문에 어린이 입맛에는 백숙보다 맛있게 느껴진다. 그러나 백숙에 쓰이는 닭의 질은 패스트푸드점의 그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시골에서 튼튼하게 자란 닭을 몇 시간이고 정성들여 고아 만든 백숙은 대량으로 기른 허약한 닭을 급하게 튀겨낸 치킨보다 훨씬 고급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 식당의 대표와도 같은 <파파이스>에서조차 여름 특별 메뉴로 삼계탕을 내놓았을 정도로 푹 고아낸 닭은 한국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여름철 보양식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할머니가 만든 백숙에는 별다른 부재료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삼, 대추 등을 넣고 고급스럽게 만든 삼계탕과는 또 다르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할머니에게는 마땅히 닭에 함께 넣고 삶을 재료가 없었을 것이다.

백숙(白熟)이라는 단어가 뜻하듯 원래 백숙은 다른 재료나 양념없이 닭 자체만 맹물에 넣어 끓여내는 것이라고 한다. 황기나 가시오가피 등 값비싼 한약재가 들어간 요즘의 백숙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지만 오히려 닭고기 맛 그대로를 살리는 데는 적당한 방법인 것 같다. 그리고 쓴 약재가 들어가지 않으니 어린이들의 입맛에도 잘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백숙을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준 것은 손자를 지극히 위하는 외할머니의 정성이다.

외할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셨던 소박한 닭 백숙은 지금은 한약재를 듬뿍 넣은 고급 보양식으로 변신해 버렸다. 패스트푸드가 전통식을 밀어내고 있는 요즘에 우리 음식이 아직도 각광받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그러나 외할머니만이 해줄 수 있는 정성스럽고 소박한 맛은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는 듯 싶어 안타깝게 느껴진다.


* 영계백숙 만들기

-재료(4인분 기준): 영계 4마리, 찹쌀 2컵, 마늘 2통, 대추 5개, 파 1뿌리, 생강 1쪽, 인삼 1뿌리, 잣 1/2큰술, 소금, 후춧가루 약간.

-만드는 법:

1. 찹쌀을 잘 씻어 건진 다음 물에 담가 1시간 이상 불려 놓는다.

2. 영계는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머리와 발을 자른 다음 깨끗이 씻는다.

3. 마늘과 생강은 껍질을 벗기고, 파는 뿌리를 자르고 다듬어 씻은 다음 3㎝ 길이로 썰어 놓는다.

4. 영계 뱃속에 불린 찹쌀을 채워 실로 꿰매고 다리를 엇갈리게 해 놓는다.

5. 큰 냄비에 영계를 담고 잠길 정도로 물을 넉넉히 부은 다음 파, 마늘, 생강, 대추를 넣고 푹 무르도록 끓인다.

6. 삶은 영계의 뼈를 발라 낸 다음 뚝배기에 1마리씩 담고 마늘, 생강, 대추, 잣, 인삼, 파 등을 넣어 다시 한 번 끓여 상에 낸다. 소금 후추를 곁들인다.

입력시간 : 2003-10-0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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