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키와 브라운이 가을을 지배한다

3인의 컬러리스트가 말하는 가을색
카키와 브라운이 가을을 지배한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올 가을 거리를 채색하며 텅 빈 공간을 채워갈 트렌드 색상은 과연 무엇일까. 색깔이 드러내는 감성은 어떤 언어보다 감동적이고 빠르며 정확하다.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경제ㆍ사회의 침통한 분위기, ‘백 투 베이식(Back to basic)’이란 기치 아래 펼쳐지는 자연ㆍ복고주의 등으로 대별되는 문화적 환경을 감각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색채의 감성이 바로 올 가을의 주류다. 회색톤의 카키와 브라운 등이 선두적 색상으로서 트렌드를 이끌 전망이다. 이들 색상은 패션 제품이 됐건 화장품의 메이크업 색상이 됐건 사람들에게는 공통적 감성의 에너지 원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감성은 극히 주관적이지만 감성의 총체는 일반적 경향이 된이다. 색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차원이지만 색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객관적 현상이다. 패션과 화장품, 가전 업계에서 10년간 색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컬러리스트 3인 들로부터 올 가을에 유행할 색깔에 대해 들어 본다.


색감 있는 회색과 복고풍의 바랜듯한 질감 표현

“불황일수록 여성들의 스커트는 짧아지고 빨간색 립스틱이 유행”이라는 속설이 있다.

경제ㆍ사회적으로 억눌리고 찌들린 생활 환경 속에서 무엇인가 에너지원을 찾고 싶어하는 빨간색 포인트는 상큼한 비타민처럼 매력적이고 강렬하게 와 닿기 때문이다. 불황일수록 시대적 상황을 연출하듯 일단은 회색 톤이 기본적인 바탕 배경색으로 깔린다. 검정과 흰색의 중간 톤으로 심사숙고 하는 듯 한 ‘이론의 색’이다. 가을 패션 시장에는 이 같은 회색 빛 우울함이 더욱 강렬하게 배어있다.

불경기로 의류 시장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공급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원사의 제작보다는 남은 원사를 모아 엮다 보면 회색이 된다는 논리다.

또한 수요자의 입장에서도 경제적인 요소는 마찬가지다.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한 철 입다 버리는 자극적인 유채색 보다는 보편 타당한 무채색의 기능성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여러 가지 색깔의 옷에 맞춰 입을 수 있는 색감 있는 회색 옷이 기능적으로 안성맞춤의 색으로 떠 오른다.

서정미(41) 제일모직 패션기획팀 패션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회색은 늘 자신을 주위에 맞춘다”며 “회색이 얼마나 밝은지 어두운지를 결정하는 것도 회색 자체 라기 보다는 주변의 색”이라고 말한다. 전체의 포인트를 주는 분홍색 이라도 연분홍 보다는 회색 빛이 감도는 다소 낮은 채도의 분홍색이 이 가을에 유행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찌들리고 바쁜 생활 속에서 리듬을 잃고 살다 보면 보다 편안하고 삶의 속도가 보다 천천히 진행하길 바라는 ‘느림의 철학’이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다. 애써 고개를 돌려 애써 뒤 돌아 보고 싶을 때다. 가을 낙엽을 태우는 냄새를 맡으며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을 갈망하는 복고적 회귀론에 빠져 들기 마련이다.

이 같은 복고주의적 요소는 가을 패션의 색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 연구원은 “아련한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듯 흐릿흐릿 하면서 바랜듯한 느낌을 주는 색감이 올 가을 패션 색상의 특징”이라고 꼽는다.

패션 업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랜듯한 느낌의 색상은 소재의 자연미를 한층 돋보이게 할 수 있다. 벨벳이든 실크 소재든 복고주의적 색상은 자연미를 더욱 드러내는 데 용이하다. 그 같은 자연미는 나무 껍질이 벗겨진 듯한 브라운 색상의 베이지 색과 낙타색 등으로 잘 표현되는데, 바로 이들 색이 올 가을을 이끌 패션 색상으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단, 검정색과 흰색 또한 기본 색상으로 인기를 끌 것이란 점도 올 추동 패션 트렌드에서 배 놓을 수 없는 점이다.


메이크업은 카키, 브라운, 연보라가 주류

올 가을 화장품 메이크 업 색상은 한층 화려해지고 경쾌한 느낌을 연출할 것으로 보인다.

가을철 여인들의 얼굴을 채색할 색조는 자연미를 강조한 카키, 브라운, 연 보라색이 주류를 이룰 전망. 특히 가을철 메이크업 전반의 개념은 피부에 화장을 입힌다는 개념보다는 본인의 혈색을 그대로 살리는 자연주의적 심미관에 초점이 맞춰진다. 질감 역시 촉촉하고 광택감을 살린 자연스런 느낌이 주류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아이셰도의 색상은 표현 방식에 있어 한층 화려한 연출기법이 동원될 것으로 보인다. 한창봉(34) ㈜태평양 이미지 메이킹팀 이미지 크리에이터 겸 컬러리스트는 “여느 가을에는 보통 눈두덩 부분을 검게 칠하는 스모키 아이 메이크업이 주류를 이뤘지만 올 가을은 정 반대”라고 말한다.

보다 맑고 연해진 아이쉐도우 색상에 펄이 들어가 광택에 따라 다양한 색상으로 변하는 옵티컬 효과를 극대화 시킨다는 것. 볼 터치 블러셔는 얼굴 윤곽선을 주기 위한 수정의 개념에서 탈피, 피부가 보다 생기 있게 보이게 하는 볼 터치 기법이 선호된다.

립스틱은 촉촉하고 반짝이는 건강한 입술의 컨셉이 단연 인기를 몰아갈 전망이다. 특별히 색상을 꼽는다면 연 보라의 유혹이 몰아칠 듯. 한 이미지 크리에이터는 “가을 한철에 유행할 색상을 규정한다는 것은 이젠 무의미하다”며 “복고주의적 색상이라도 새로운 아이디어와 디자인, 이미지, 질감 등에 따라 다양하고 복합적인 색상이 연출되는, 다인일색(多人一色)의 시대에서 일인다색의 시대로 접어든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가전 제품은 회색톤과 알루미늄 실버톤이 인기 끌 듯

가전과 인테리어도 올 가을에는 새로운 색상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핸드폰 등 고가 제품을 제외하고는 패션 제품과 거의 동일한 색상의 변동 주기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패션과 동질의 문화를 공유하는 자연미를 살리면서도 보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하이테크의 기능을 색상으로 연출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이는 현대 디자인의 고전적 문구다. 복잡한 장식이나 쓸데없는 무늬는 색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흰색과 회색 검정색 등 중립적인 색의 경우, 그 같은 법칙은 더욱 유효하다.

유채색을 포기하면 객관성과 기능성에 대한 요구가 생겨난다. 색은 사라지는 대신 기술이 전면에 나선다는 새로운 개념이 주조로 부각되는 것이다.

가전의 경우, 고전적으로 흰색이 기본 바탕을 이루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백색 가전’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흰색은 가장 고급스럽고 완벽한 색이다.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하얀 개념은 없다. 빛의 마술사, 인상주의자들은 흰색을 무색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백색은 이른바 ‘광(光)발’의 색으로 각광 받고 있다. 경우 바른 언어가 말발을 세우듯, 백색은 올 가을의 ‘광발’을 세울 전망이다.

금속성의 가전 제품을 보다 따듯한 이미지인 ‘웜 디지털(warm digital)’로 표현하기 위해 흰색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텔레비전과 오디오 등 검정색 천지였던 제품들에 흰색이 연출됐다. 3년 전부터 불었던 이 같은 흰색 바람은 올 가을을 고비로 회색톤이 첨가되고 알루미늄 실버로 바뀌어 갈 전망이다.

흰색도 조약돌에서 처럼 투명감이 있고 깊이가 있는 흰색으로 변이해 간다. 광물 등에서 느낄 수 있는 광택감 있고 자연스러운 흰색을 되살리는 것이 올 가을 가전 컬러리스트들의 최대 관심사다. 회색이 감돌면서 하얀 빛을 유지하는 고급스러움이 기술력을 강조하는 핸드폰과 가전제품 들에게는 생명이다.

반면 일상 용품에는 유채색이 비교적 많이 사용된다. 주부들이 빨간 주전자와 빨간 밥솥을 구입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심리적으로 생활의 원동력을 찾고 싶은 충동의 반영이다.

고은영(36)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 디자인연구소 감성디자인그룹 책임연구원은 “고가의 전자 제품 주기를 고려할 때 고객들은 색상을 고르는 데 있어 감성적인 선택 보다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프로세스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그러다 보면 화려한 유채색 보다는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색상쪽으로 무게를 더 두게 된다”고 분석했다.

흰색과 회색, 검정의 중성적인 모노 톤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는 얘기다. 고 연구원은 특히 “올 가을의 인테리어와 가전 제품 유행 색상은 기본적으로 심플하고 우아한 카키톤의 회색과 실버 톤이 인기를 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 2003-10-06 10:04


장학만 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