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상봉의 亂을 피해서 보는 세 편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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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상봉의 亂을 피해서 보는 세 편의 영화

언제부터인지 ‘가족’하면 ‘남들만 안 보면 버리고 싶다’던 기타노 다케시(‘소나티네’, ‘하나비’의 감독)가 떠오른다.

특히 온 가족(친척 포함)이 모이는 명절 때가 되면 ‘불법투기’의 유혹이 더 거세진다. 하지만 감히 천륜을 저버릴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을 폐기처분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내가 유배를 가자’하는 심정으로 독수공방을 자처한다. 그럴 때 찾아보면 좋을 비디오 세 편을 소개한다.


가족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로얄테넌바움

근대 사회에서 모성애는 생물학적 본능 이전에 사회적, 문화적 제도로 여겨진다. 여자의 능력을 어머니로 국한시킴으로써 남성이 보다 자유로운 사회 생활을 영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다.

하지만 부성애는 생물학적이든 제도적이든 한번도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다. 여성에게 모성애가 전부라면 남성에게 부성애는 부차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종종 경제력이 곧 부성애라고 믿는 아버지도 많다) 하지만 부성애의 부재는 분명 아이 성장에 치명적인 결함을 일으킨다.

세 명의 천재 자녀를 둔 테넌바움씨(진 헤크만)는 부성애가 상당히 결핍된 인간이다. 부동산 투자 전문가로 10대부터 회사를 경영한 천재 체스(벤 스틸러), 글쓰기에 남다른 재주가 있는 딸 마고(기네스 펠트로), 주니어 테니스 챔피언 리치(루크 윌슨)는 유난히 잔정없는 아버지로 인해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결국 성장의 정상궤도를 이탈해버린 이들은 천재성을 제대로 꽃 피우지 못하고 사회를 등진 채 자기세계에 빠져든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집을 나갔던 아버지가 이들 앞에 다시 등장한다. 여전히 정이 가지 않는 경망한 모습 그대로. 사실 테넌바움씨가 집에 돌아온 이유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가 아니라 생활비 부담이 너무 커서다. 돈이 떨어진 궁색한 늙은이가 아버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디 비빌 자리 없나 하고 찾아 든 꼴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도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빨간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니는 체스는 안전 강박증에 걸렸고 스모키한 화장에 창백한 얼굴을 한 마고는 세상과 소통의 끈을 놓아버렸다. 테니스 선수였던 리치는 어딘지 비밀을 감추고 있는 모습이다. 테넌바움씨는 시한부 인생인척하며 이들과 화해할 기회만을 엿본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에 없던 부성애를 발휘해 가족들과 극적으로 화해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말자. 인생은 원래 지루한 마라톤이고 가족의 화해란 대부분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렇게 은근슬쩍 이루어지는 거니까.


미워도 다시한번
라이딩 위드 보이즈

‘It is little, and broken, but still good.’(보잘 것 없고 가난한 가족이지만 그래도 행복해. ‘릴로와 스티치’중) 과연 그럴까? 고등학교 때 실수로 임신을 해서 낳은 아들, 착하지만 무능력한 남편,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하고 구질구질한 집안일에 매여있는 나. 보잘것없고 가난한 가족인데 과연 이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주인공 베브(드류 베리모어)는 작가를 꿈꾸는 발랄한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창피를 당하고 얼떨결에 고등학교 중퇴인 현재의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실수로 임신을 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뉴욕대에 진학하고 싶어했던 베브는 육아와 학업을 병행하기 힘든 걸 깨달으며 지쳐가고, 미덥지 않?남편은 무료한 일상에 지쳐서 점점 헤로인에 중독된다. 병든 남편을 간호하랴, 어린 아들을 건사하랴 고군분투하는 베브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절망적일 뿐이다. 그래도 잔인한 인생을 버텨낼 힘은 아직 남아있다.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베브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은 아들이다. 특히 신음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아들의 방에 건너와 아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는 장면에 이르면 철없는 나이에 엄마가 된 베브가 이제야 성숙한 어머니가 됐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성숙한 어머니도 가족의 해체는 막을 수 없었다.

남편과 헤어진 후 베브와 아들이 또 한번 전쟁을 치르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혼한 부모에게 아이들은 냉담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인생의 족쇄이자 일생의 트라우마인 가족은 불편하고 부당해도 벗어날 수는 없는 것. 무엇보다도 벗어버리기에는 아직은 괜찮은(Still Good) 울타리라는 것을 주인공들 역시 구렁이 담 넘듯 깨달아 간다. 또한 가족은 지루한 장기전을 치른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다.


거추장스럽지만 사랑스런 가족
나의 그리스식 웨딩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상당한 흥행 성적을 올린 동시에 그리스 문화열풍까지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부활절에 꼬챙이에 꽂아 먹는 양고기와 전통술 우조, 무사카(저민 고기, 가지, 토마토, 감자를 치즈로 볶고 화이트 소스를 쳐서 구운 요리), 스파나코피타 파이(시금치와 염소치즈, 양파 등을 넣은 패스트리)와 같은 그리스 요리들이 영화에 나오면서 그리스 식당이 인기를 얻기도 했고 그리스식 결혼의 모습이 소개되기도 했다. (신부에게 침을 뱉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중해나 에게해 주변 나라들은 ‘악마의 눈’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침을 뱉거나 지저분한 것을 묻힌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흥행의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 그리스인들의 놀라운 대가족주의였다. 즉, 과잉의 가족주의 사회가 가족애가 결핍된 메마른 사회에 문화적 충격을 준 셈이다.

이 영화는 짜임새 있는 이야기는 없지만 그리스 가족문화를 사실대로(주인공의 자전적인 내용을 토대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자민족 우월주의에 빠진 툴파의 아버지는 툴파가 30살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게 내심 답답하다.

그리스 여자의 존재 이유는 단지 그리스 민족의 증식에 있는 바, 그 외의 어떤 사회 활동과 교육 활동도 인정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완고한 뜻과 달리 툴파는 가족의 품을 벗어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결국 비그리스인 남자(미국인)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흥미진진해 진다. 비그리스인 사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아버지와 그리스 문화를 익혀야 하는 남자 사이의 문화적 갈등이 그리스 음식문화, 종교문화 속에서 잘 버무려져 나온다. 가족 상봉의 이벤트에 심리적 부담감을 가졌던 사람들은 영화 속 대가족주의의 압박을 보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지는 않을까?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3-10-06 10:51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