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프레소] 재즈로 철학하는 김봉규


“제일 처음 떠 오른 단어는 ‘만남’이었어요. 다양성과 다자성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통일성이 공존하는.” 철학자 김봉규(44ㆍ서강대 강사)씨는 재즈에 관한 한, 분명 늦깎이다. 그러나 그가 진작에 쌓아 올린 사유의 깊이 덕에, 그는 재즈라는 텍스트로부터 영롱한 메타포를 건져 올렸다.

드디어 7월 23일 오전 9시, 서강대 철학과 계절 학기 수업에서 그는 자신이 이뤄 낸 독특한 재즈관을 학생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대단히 독특한 방식으로. 지난해부터 해 오던 교양 과목 ‘철학과 인간학’이었다. 여러 과에서 모인 2학년 이상의 학생 80여명이 두 대의 기타가 강의실에 들어 오고 있는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 보고 있었다.

“그냥 느끼세요.” 마치 화두처럼 툭 던져 졌을 뿐, 그 밖의 언어는 일절 없었다.

자신의 제자와 함께 나온 재즈 기타리스트 민영석의 말이 떨어지고 곧 이어 평소 보기 힘든 재즈 기타 듀엣이 펼쳐졌다. 현란한 속주로, 때로는 대화를 나누듯 절묘하게 ‘All The Things You Are’와 블루스 즉흥이 펼쳐졌다. 학생들은 눈앞의 일이 꿈만 같았다. 철학 수업에서 재즈를 평소 접할 수 없었던 형식으로, 그것도 수준급으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던가. 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민영석 등은 스탠더드를 완전 즉흥으로 펼쳐 보이고 나서야 놓였다.

마치 해프닝 같던 시간이 지나가고 난 뒤, 김씨는 시를 읊어 갔다. “내가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단어의 첫 음벌은 과거를 향해 떠난다//내가 ‘무’라고 말하는 순간/나는 무언가를 창조한다//내가 ‘고요’라고 말하는 순간/나는 그 고요를 깬다”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폴란드의 여류 시인 쉼보르스카의 ‘세 개의 이상한 낱말’이었다. 내재하는 의미를 포착하는 순간, 실재는 날아가 버린다는, 지극히 선적(禪的)인 어떤 경지다.

학생들로부터 묘한 공감의 눈빛이 왔고 이어 그는 같은 시인의 작품 ‘모래 알갱이가 있는 작은 풍경’을 암송해 주었다. “자신이 사물을 비춘다는 사실에 대해 태양은 무관심하듯, 모래 알갱이 역시 자신이 모래 알갱이라는 데 대해 관심이 없다는 내용의 시죠.”

모든 것이 즉흥처럼, 아무런 약속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6월말 교내에서 벌어졌던 민영석의 워크샵 ‘재즈 스터디’를 보고 그의 연습실로 가 새벽 4시까지 이야기하다 강의실까지 가지고 가기로 의기 투합된 결과였다. “연세대1백주년기념관 콘서트 등을 통해서 알게 된 민영석은 휼륭한 연주로, 지금까지 내가 갖고 있던 음악적 고정 관념을 깨뜨려 준 사람이죠.”

그가 재즈를 알게 된 것은 독일 유학 당시 키스 재릿의 연주를 듣고 나서부터였다. 재즈의 만남은 조화라기보다는 ‘완벽한 홀로이되 다 함께’라는 깨달음이었고, 그것은 곧 자신의 철학하기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만남’은 그의 영원한 화두다. 즉흥의 순간에 가장 인상적으로 파악된 재즈라는 예술의 본질 역시 만남이었다. 대전의 봉쇄 수녀원(한 번 들어가면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는 수녀원)인 ‘갈멜수녀원’ 등 구도자들에게도 그는 만남을 논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만남의 세계다. 수도자앞에서 그는 섹스와 성 문화 등도 궁극적으로는 만남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논했다. 철학자 롤랑 바르트의 이론을 심화시킨 결과였다.

만남의 통로로서 재즈를 택한 그는 구체적인 실천 경로를 택했다. 독일 쾰른대 유학 시절, 거리 음악가들 중 특히 멋져 보였던 악기인 콘트라베이스를 이번에는 직접 배워 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경기 양주의 악기 공방에서 100만원을 주고 산 콘트라 베이스는 어려서 기타와 바이올린을 다룬 적이 있는 자신의 꿈을 회복시켜 주리라고 그는 믿는다.

“재즈는 나라는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 믿어요. 실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재즈란 내게 있어 철학적, 종교적 사유와 같습니다.”

김씨가 2학기에 펼칠 강좌는 ‘철학과 현실’ 등 두 과목. 강당 수업은 아니자만, 중간 고사 직전에 이번처럼 강의실을 강당으로 바꿔 라이브와 강의를 병행할 계획이다. 이번에는 재즈라는 음악적 현상을 중심으로 민영석의 강의까지 곁들일 계획이다. 그는 민영석을 가리켜 “내 영혼의 친구”라고 말했다. 완벽한 타자이면서 하나라는 것이다.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3-10-06 11:18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