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나미(上)


7살의 어린 나이에 미8군 무대를 통해 가수활동을 시작했던 효녀 가수 나미. 그녀는 댄스가수의 효시인 60년대 이금희, 70년대 김추자의 계보를 잇는 80년대 최고의 댄스가수였다. 곡마다 컨셉을 달리하는 특이한 헤어스타일과 의상, 춤, 그리고 독특한 무대 연출은 자신의 음악을 돋보이게 하려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음악외적인 연출력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무엇보다 가슴으로 파고드는 섹시한 허스키보이스로 무장했던 가창력의 가수였다. 여가수로는 최초로 랩과 디스코를 리믹스했던 최대 히트곡 '인디언 인형처럼'은 신선했다. 청소년층에는 가히 '나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그녀는 80년대 최고 슈퍼스타 조용필과 더불어 최고 여성 슈퍼스타였다.

본명이 김명옥인 나미는 1957년 10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에서 미군을 상대로 해적음반 레코드점을 경영했던 부친 김종은씨와 모친 김귀례씨의 1남 4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레코드가게에서 팝송과 더불어 성장했다. 네 살 때부터 하루종일 틀어대는 최신 유행 팝송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반을 구입하러 온 미군들은 앙증맞게 춤을 추며 재롱을 부리는 네 살짜리 꼬마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이내 동두천 일대에선 '똘똘이 춤'을 추는 그녀를 모르면 '소련에서 보낸 간첩'으로 통했을 정도. 일곱 살 때 미군장교의 소개를 받은 미8군 쇼 프로모터가 찾아왔다. 반신반의했던 프로모터는 귀여운 꼬마 소녀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8군 무대에서 부른 첫 노래는 레이 피터슨의 '코리나 코리나'와 폴 앵카의 '오 캐롤'등 당시 최고의 히트팝송들. 깜찍한 율동과 더불어 간드러지게 부르는 7살 소녀는 미군들의 혼을 빼놓았다. 동두천의 극장들을 물론 서울의 극장들에서도 쇼 출연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딸의 예상치 못한 인기에 부친은 레코드점을 정리하고 쇼 가수로 키우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결심했다.

동두천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후암동으로 이사를 해 삼광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아버지를 따라 시내 곳곳의 극장무대와 미8군 무대에서 매일같이 노래를 불렀다. 당시 국내 쇼 무대는 박활란, 하춘화, 오은주등 꼬마 스타들의 전성시대였다.

나미는 발군의 춤 솜씨와 노래재능으로 단숨에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5학년이 되자 당대 최고 인기가수 이미자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엘레지의 여왕'에 어린 시절의 이미자 역을 맡으며 배우로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미니스커트 열풍을 일으켰던 가수 윤복희씨의 인생을 그린 '미니 아가씨'에 꼬마 윤복희로도 출연했다.

70년 상도여중에 입학, 2학년이 되던 71년 새롭게 결성된 5인조 여성 록 그룹'해피돌즈'의 멤버가 되었다. 당시 멤버들은 기타와 플롯 겸 보컬에 김명옥(나미), 기타 겸 섹스폰 김승희, 베이스 이종숙, 기타 겸 트럼본 김승미, 드러머 김은숙이었다. 이중 김승희와 승미는 친자매였다.

단장 유칠완씨의 지도로 몇 주간의 연습 후 미8군 쇼 오디션에 응시 AA라는 높은 점수로 8군 무대에 진출했다. 당시 미8군 무대에는 또 다른 10대 여성밴드 서울패밀리가 있었다. 인기 경쟁을 벌였던 두 팀은 사이좋게 월남참전 미군 위문 공연단으로 베트남에 갔다.

당시 그녀의 레퍼토리는 다미타 조의 'IF YOU GO AWAY'나 잭슨 파이브의 'BEN'등. 2년 간의 위문공연 생활은 고된 시절이었다. 노래하다 무대 옆으로 베트콩들이 쏘아대는 박격포 탄이 터져 마이크를 내던지고 피신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73년 2월, 부산항을 통해 귀국한 해피돌즈는 소공동 라스베가스클럽에 출연하며 미국진출을 꿈꿨다. 당시 해피돌즈는 트리퍼즈, HE6, 키 보이스, 라스트 찬스 같은 기라성 같은 남성 록 그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인기를 누렸다. 73년 가을, 미국 진출 꿈이 상사되어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첫 무대는 하이아트 리전시 호텔의 나이트 클럽. 달콤하고 감미로운 사운드나 춤추기 좋은 고고음악 위주로 활동했던 해피돌즈는 세계 록의 흐름을 주도하는 그곳에선 닷새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제퍼슨 에어플레인등이 주도하는 히피 운동과 사이키델릭 세상이었다. 피나는 연습 후 현지 밴드들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당시 해피돌즈의 한달 보수는 4천 달러 정도. 나미는 용돈을 쓰고도 매달 1백 달러 씩 서울에 계신 부모님께 송금했던 효녀였다. 이들은 5년 간 미국 전역을 돌며 잭스 파이브, 오스먼드 패밀리등의 히트곡과 '아리랑'을 빠트리지 않고 불렀다. 나미는 이 시절의 무대활동을 통해 최신 음악감각을 체득하며 역량을 쌓았다.

1976년, 이국적인 용모로 밤무대에서 귀여움을 받던 그룹 해피돌즈는 캐나다 토론토의 한 레코드사에서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아리랑','김치 깍두기','미스티 블루'등이 수록된 앨범은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미스티 블루'를 부르는 나미는 제법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5년에 걸친 장기 해외공연은 향수병을 일으켰다. 떠날 때 15세 소녀였던 그녀는 1978년 스무살 처녀로 돌아왔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었지만 뒤늦게 남동생이 임파선 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해피돌즈는 해산이 되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3-10-06 11:51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